따뜻한 한마디
03/23/20  

뚜렷하게 앓고 있는 병이 없으면서도 병원을 방문하는 일이 연중행사처럼 되어 버렸다. 지난해 10월 설사가 심해 대장내시경이나 위장내시경 검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담당 의사를 만났으나 소변검사, 피검사, 대변검사는 하라고 하면서 내시경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11월 말에 의료보험을 바꾸고 담당 의사를 한국인으로 바꿨다. 그러나 의사를 바로 만날 수는 없었다. 3개월을 기다려 2월 20일 처음으로 담당 의사를 만났다. 우선 언어가 자유롭게 소통되어 좋았다.

 

이전 담당의는 중국계 여의사였는데 여러모로 불편했다. 담당의를 바꾸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그녀의 말과 행동 때문이었다. 내가 나의 여러 가지 증세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중간에 끊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에 하라는 등,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 환자를 대했다. 환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20분인데 너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다면서 얘기를 더 들으려 하지 않고 얘기 도중에 말을 끊고 나가버리기도 했다. 앞에 얘기한 것처럼 보험을 바꾸면서 담당 의사를 한국인으로 바꿨다.

 

담당 의사는 대장내시경과 위장내시경 검사를 하기 위해 예약을 하라고 했다. 담당의가 선정해준 위장내과에 전화를 걸어 3월 18일로 예약을 했다. 의료시스템이 담당의사가 환자를 직접 검사 병원으로 보내서 검사를 받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담당의가 환자를 전문의에게 보내서 그의 소견에 따라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전문의를 만나는 것은 사실상 불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2월에 의사를 만났는데 전문의를 만나는데 한 달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위장내과 방문하기로 한 하루 전 날(17일) 위장내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내일 병원 예약한 날인데 요즈음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니까 다음으로 연기할 수도 있다며 연기할 것을 종용했다. 나는 예정대로 의사를 만나겠다고 했다. 그러자 혹시 열이 높거나 호흡이 곤란하지 않은가 물었다. 괜찮다고 하자 환자들이 많으면 실내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자동차에서 대기하다가 들어 올 수도 있고, 실내로 들어오기 전에 열을 재겠다며 그런 불편을 감수하겠냐고 물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그럼 좋다고 하면서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오라고 했다.

 

위장내과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두어 번 노크를 하자 문을 열어주었다. 간호사는 문을 열면서 누군가 묻고 예약 여부를 확인하자마자 체온계를 귀에다 들이 밀었다. 체온이 정상이라면서 들어오라고 했다. 간호사는 여러 장의 종이를 내밀면서 작성하라고 했다. 환자가 병원에 갈 때마다 작성해야 하는 서식이다. 모두 작성해서 주자 보험카드를 달라고 했다.

 

간호사가 키를 재고 몸무게를 측정했다. 다 형식적이다. 신을 신고 키를 재고, 옷을 입고 주머니 속에 모든 물건을 그대로 둔 채 몸무게를 쟀다. 진료실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의사가 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바쁘다는 듯이 허둥대었다. 그리고 내가 기록해서 제출한 서류를 보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더니 5월 19일 내시경 검사를 하라고 했다. 지극히 형식적인 절차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담당 의사를 선정하고 만나는데 3개월을 기다려야 했고, 위장내과에 전화를 걸어 예약 후 한 달을 기다렸으며, 병원에 와서 서류를 작성하고 간호사가 키를 재고 몸무게를 재고, 10여분을 기다린 다음에 만난 의사는 약 2분 만에 진료를 마쳤다. 그리고 내시경 검사는 앞으로 또 두 달을 기다려야 한다.

 

잠시 후 간호사가 들어와서 아래층 약국에서 검사에 필요한 약물을 살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 약물을 지금 사갈 수 있는 돈이 있느냐? 혹은 평소에 다니던 약국이 있다면 그곳에서 구입하겠는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약국에 가서 약을 구입해 가라고 하면서 검사 하루 전날 마셔야 할 그 약물 사용 방법에 대한 한글 설명서를 주었다.

 

약국에서 만난 월남계 젊은이는 내게 약물을 건네주면서 친절하고 자세하게 약물 사용법을 설명해주었다.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혹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면서 설명했다. 매우 친절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의 라스트 네임을 뭐라고 읽느냐고 물었다. AHN, 안이라고 발음한다고 하면서 그에게 왜 그걸 묻느냐고 되물었다. 다음에 같은 이름의 환자를 만났을 때 정확하게 발음하고 싶어서라고 그가 말했다. 무언가에 꽉 막힌 듯했던 가슴이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진심으로 환자를 위해 일하려는 의사나 간호사를 만나기는 어려운 듯하다. 내가 최근 만난 그들은 그저 내 할 일만 하면 그만이라는 듯이 행동했다. 모두가 ‘바쁘다 바뻐’를 외치며 허둥지둥 무언가에 쫒기 듯이 빨리 말하고 급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건네는 따뜻한 미소와 진심이 담긴 말 한 마디가 환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기왕에 해야 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조금 여유를 갖고 환자들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만나면 어떨까. 시간을 그렇게 더 많이 잡아먹는 것도 아닐 텐데 바쁘다는 것을 감추지 않고 환자들에게 보여줘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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