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본 공은 있다
03/23/20  

코로나19로 학교 개학도 연기되고 학원도 휴원해 우리집 아이들은 몇 주째 집에서만 생활하고 있다. 딸은 두 번째 개학 연기 발표가 있을 무렵 코로나19로 인해 감옥으로 변한 집을 그림으로 표 할 정도였다. 때마침 코로나 사태 바로 직전, 내가 워킹맘이 되었던 탓에 염치없이 아이들은 양가 어머니들의 차지가 되었다.

 

며칠 전은 시어머니께서 우리집에 오셔서 아이들 점심을 챙겨주시고 아직 미취학 아동인 막내를 본가로 데려가시는 날이었다. 그런데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시누이로부터 오늘 집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 보니 우리집 둘째인 딸이 할머니에게 말대답을 하며 대들다가 건너지 말아야 할 강까지 건너고 만 모양이었다. 시어머니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셨고 당분간 보이콧까지 선언하셨다.

 

눈앞이 캄캄했다. 솔직히 아이와 어머니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랴. 결국 다 내가 자초한 일이 아닌가! 애초에 내가 아이들을 돌봤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갑자기 일을 하겠다고 나서서 결국 온가족을 힘들게 만든 건 아닌가 자괴감이 들었다. 딸의 버릇없는 행동에 화도 나고 괘씸했지만 아이에게서 어쩐지 어릴 적 내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아 마음이 더 좋지 않았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미국 조기 유학 길에 올랐고 그때 친할아버지께서 부모를 대신해 오빠와 나를 돌봐주시고 보호자 역할을 해주셨다. 매일 학교 라이드를 해주시고 끼니를 해결해주셨고 집안일도 도맡아 하셨다. 일 년에 서너 번 명절 때만 만나던 할아버지는 유난히도 나를 예뻐하셔서 나도 할아버지도 몹시 따르고 좋아했는데 같이 살면서는 하나둘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똑같은 반찬, 할아버지의 불안한 운전, 해병대 출신인 할아버지식 규칙들도 피곤했지만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할아버지가 매번 한국에서 오는 편지들을 숨기고 외출 시 집 전화기까지 챙겨 가셨던 일이다. 그 당시 할아버지는 우리가 한국을 다 잊고 미국에 빨리 적응하길 바라셨지만 중2였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그때, 한국 친구들의 편지만이 나의 유일한 낙이고 희망이였기에 그 상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극으로 치달았다.

 

그때부터는 나 이제 건드리지마. 삐뚤어질 테다로 돌입, 한동안 할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가득했다. 할아버지가 아무리 애를 쓰고 공을 들여도 부모와 같을 수가 없었다. 부모라면 당연했을지도, 괜찮았을지도 모르는 일들이 조부모에게는 똑같이 적용이 되지 않는 듯했다. 혼을 내면 더 서러웠고, 가만히 두면 관심조차 없구나 싶었고, 옛날 사람 특유의 투박하고 인색한(다소 부정적인) 표현들은 날카로운 못이 되어 내 가슴에 상처를 냈다.

 

그러나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상처받은 건 나뿐만 아니었다는 것을. 어른도 상처 받는다는 것을. 아니, 어린 아이보다 더 깊게 베이고 더 시커멓게 멍이 든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사춘기 절정의 손주들을 돌보며 얼마나 외롭고 답답하셨을까……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셨을까…… 아무런 보상 없이 희생하는데 새파랗게 어린 손주들은 말을 듣지 않고 잘났다고 까불어 댔으니 말이다.

 

맞벌이 부부의 미취학 아이 열에 여섯은 조부모 손에 자란다고 한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안전한 보육이기 때문이다. 부모 다음으로 아이를 지극정성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조부모뿐이다. 하지만 조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의 70% 이상이 ‘그만 봐도 된다면 손주 보기를 그만두고 싶다’라고 답했다고 하니 분명 만만치 않은 일임이 확실하다.

 

딸이 가여운 마음,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 할아버지가 그리운 마음에 며칠 꽤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 타이밍이 참 마음 같지 않구나 싶어서 속상하기도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분명 애 본 공은 있다. 그 노력과 정성은 분명 언젠가는 빛을 발한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우리가 함께하는 동시간대일 수도 있고 더러는 이 세상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나의 할아버지도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빙그레 웃으며 “이제 알았느냐?”하고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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