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노매드
04/06/20  

가끔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지내던 제자 C 군이 델라웨어로 이사 간다고 했다. 왜 그렇게 멀리 가느냐고 물으니 첫마디가 델라웨어주에는 세금이 없다는 것이었다. 판매세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사업에 적합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동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할 계획이라고 했고, 계획대로 대륙을 횡단해서 델라웨어주에서 세 번째 큰 도시 뉴웍(Newark)에 잘 도착했다고 전화로 알려왔다.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수화기를 놓는 순간 문득 Nomad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현대판 노매드.

 

Nomad를 단순히 유목민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노매드는 두 부류로 나뉘기 때문이다. 한 부류는 중국, 몽골, 티베트, 러시아 일부, 동유럽 국가 등이 포함된 방대한 유라시아 지역과 아랍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중동 지역을 무대로 목초지대를 찾아 이동하며 생활하던 유목민들을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유럽에서 중국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를 만든 사람들로 한 지역의 특산물이나 상품 등을 매입하여 다른 지역에 가서 그 지역의 특산물 등과 교환하거나 팔 목적으로 그 길을 따라 이동하며 생활하던 상인, 좀 더 거창한 표현을 쓰자면 무역상들을 말한다.

 

유목민들은 주로 사냥과 채집(수렵과 채취)에 의존하여 생활했다. 그들은 식량이나 이동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낙타, 소(혹은 야크), 말, 염소, 양 등을 길렀다. 낙타, 소, 말 등은 땅위로 나와 있는 풀을 뜯어먹지만 이빨이 날카로운 염소나 양 등은 땅속의 뿌리까지 뽑아 먹어치웠다. 그렇다보니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더 이상 그 지역에서 풀은 자라지 않게 되고,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지게 되어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상인 그룹은 무역이나 장사를 위해 이동하면서 여러 지역의 문화를 전파하거나 소식을 전하는 일도 겸하게 되었고, 씨족이나 부족으로 나뉘어 있던 집단들이 서서히 국가 형태를 갖추게 되면서 나라를 대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좀 더 엄격하게 말하면 정치가들이 이들을 이용해서 나라간의 이해관계를 형성했거나 소위 외교적인 일에도 관여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노매드들이 우리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했다. 동서양의 문물이 자연스럽게 교환될 수 있었고 심지어 병을 옮길 수도 있었다. 이들로부터 위정자들은 세금을 징수하려고 노력했으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한곳에 정착해 살지 않으니까 이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들일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설령 세금을 부과하더라도 하룻밤 사이에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리면 받아낼 길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정부는 이들이 한곳에 모여 살도록 유도하였으나 아직도 그들은 납세를 거부하며 유목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이처럼 두 부류의 노매드들이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세상에 또 하나의 노매드들이 탄생했다. 이른바 21세기의 노매드, 그들은 실제로 낙타나 말을 타고 이동하지 않는다.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이동하고 움직이며 거래한다.

 

21세기 노매드들은 주로 온라인상에서 초원지대를 찾아다니고 거래를 한다. 또, 온라인으로 받은 주문에 의해 오프라인으로 물건을 주고받기도 한다. 이에 발달한 것이 택배문화이다. 이때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세금 문제이다. 각국 정부는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고 팔 때도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다. 유목민들은 어디론가 떠나버리면 받아낼 수 없었지만 온라인상으로 이루어진 거래는 흔적이 남기에 세금을 내지 않을 길이 없다. 판매세가 없는 델라웨어주가 사업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는 것도 결국 세금 문제 때문이다.

 

델라웨어는 주 전체 인구가 100만이 안 되는 아주 작은 주이다. 그러다보니 다른 주들처럼 경제정책을 펼치면 경제 규모면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델라웨어주는 소비세(Sales Tax)를 없애 기업들의 유입을 유도했다. 그 결과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의 60%가 델라웨어에 본사를 두고 있다.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로드아일랜드주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델라웨어주는 이런 노력 덕분에 2017년 기준으로 15번째로 잘 사는 주가 됐다. 타주에 비해 물가도 싸고 주택이나 렌트비도 저렴해 생활비가 적게 들어 주민들의 삶의 만족도도 큰 것으로 알려졌다.

 

C 군이 이주한 뉴웍시는 델라웨어주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의 숫자가 3만 5천 명을 넘지 않는다. 그 중 80%가 백인이며, 9%가 흑인, 8%가 아시안으로 캘리포니아에 비해 소수인종이 그리 많지 않은 백인 중심의 커뮤니티이다. 이런 인종 분포 때문에 아시안인 C군이 그곳에 수월하게 정착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모국을 떠나 언어적 불편함과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면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삶 자체가 생존을 위해 목초지대를 찾아 헤매고, 거래를 위해 낙타와 말을 타고 달리던 노매드들의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C군은 자리 잡는 대로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가 뚝심과 사업적 수완을 발휘하여 낯선 땅 델라웨어에서 성공적인 21세기 노매드의 삶을 훌륭히 일궈 내리라 확신한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