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내려와
04/13/20  

여러 날 계속해서 비가 오고 있다. 잠시 쉬었다 내리기도 하고, 하늘이 뚫린 듯 퍼붓기도 한다. 한국의 장마철이 연상된다. 비가 잠시 그치면 그 틈을 타 하얀 구름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사자, 코끼리, 낙타, 기린, 은행나무, 소나무, 등나무 등 각종 모양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저 멀리 검은 구름이 무서운 기세로 하늘을 뒤덮고 싸울 듯이 밀려오고 있다. 저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 아래에는 비가 퍼붓고 있으리라.

 

전 세계가 신종 바이러스, ‘코로나19’로 고통을 겪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신종 바이러스 확진자가 1,615,290명에 달하고 사망자는 96,798명이다. 통계에 잡히지도 않은 채 감염되어 신음하거나 죽어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바이러스 감염으로 투병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미 목숨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직 감염이 되지 않은 사람들도 감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역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어렵고 힘든 때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쉬 진정되지 않고 길어지면서 육신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점점 무기력해져 가고 있다. 하루 종일 세끼 밥 챙겨먹으면서 이렇다 하게 할일이 없다는 것도 무척 괴로운 일이다. 하루 이틀은 그런대로 견딜 만하지만 한 주, 두 주, 세 주, 기약 없이 집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생활은 누구라도 견디기 어렵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다. 북가주에 사는 딸이 ‘코로나19’ 사태로 재택근무하게 되었다며 잠시 다녀가겠다고 전화했다. 오랜만에 오는 딸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오기로 한 날 딸은 다시 전화해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방문을 미루겠다고 했다. 당시는 북가주에서 ‘코로나19’가 더 극성을 부리고 있었을 때여서 딸이 집에 다녀가는 것을 포기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막내아들은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며 집으로 냉큼 달려왔다. 왔다는 표현보다는 들이 닥쳤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보스턴에서 살고 있는 아들은 일 년에 서너 차례 집에 다녀간다. 하지만 그때도 함께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늦게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다음 체육관에 가서 운동하고 와서 씻고 쉬다가 저녁이 되면 외출해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새벽에 들어왔다. 친구들 만나러 와서 집은 숙소로만 이용한 셈이다.

 

그런 아들이 밖에 나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야 하니 갑갑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재택근무인지라 일하는 시간에는 제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배고프면 내려와 배 채우고는 또 다시 방콕, 하루 이틀은 그런대로 견디나 보다 했는데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되자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 괴성을 지르기 시작하더니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집안에서 농구공으로 드리볼을 하면서 놀았다. 어제는 월마트에 가서 이동식 농구대를 사갖고 왔다. 아니 그걸 어디다 설치하고 놀 것인가 물으니 집 앞 큰길에 놓겠다는 것이었다. 오마이갓, 그건 말도 안 된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동네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비록 오가는 차량이 많지는 않다 하더라도 통행에 지장을 줄 수도 있으니 제발 그만두라고 했다. 과거 동네 몇몇 집의 아이들도 집 앞 길에 이동식 농구대를 놓고 몇 번 노는가 싶더니 이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농구대는 아직 포장도 뜯지 않고 차고에 놓여 있다. 아들도 환불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가하면 아들은 SNS에 올릴 동영상을 만들겠다며 도움을 부탁했다. 아들에게 화가 난 아빠를 연기해달라고 했다. '당장 내려와.'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었다. 악역일망정 기꺼이 열연했다. SNS에 올린 지 하루 만에 천 명이 봤다고 소란을 부리더니 다음날은 2천이 넘었고 댓글도 폭주하고 있다며 난리를 쳤다.

 

오래 전에 사서 책꽂이에 꽂아 두었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종전 후 3 년이 지난 1948년, 39살에 연인과 함께 꼭 껴안고 강물에 뛰어 들어 생을 마감한 일본 작가의 소설로 전쟁 중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 소설에는 북경에서 와 일주일 머물다가는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 쌀 배급을 받으러 파출소에 가서 수속을 밟고, 남의 집에서 배급주(酒)를 얻어오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 우리도 전시에 버금가는 상황을 겪고 있다. 어쩌면 그때보다 더 위험한 전투를 치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선(戰線)이 없고 보이지도 않는 적,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다.

 

밤새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저 비가 바이러스를 몽땅 쓸어 가버리기를 두손 모아 기도한다. 하루 빨리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눈뜨면 일터로 가서 해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날을 고대한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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