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등에 불이 떨어져야
04/13/20  

나는 갑작스러운 일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나름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도 좋아하고 모험도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계획에 없던 일이 급작스럽게 눈앞에 펼쳐지면 은근 당황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무엇이 되었든 미리 준비하는 편이고 최대한 다양한 수를 고려하여 미리 계획하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물론 아무리 애를 써도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지만.

 

뭐 기껏 해 봤자 손님이 온다고 하면 미리 청소를 하고 약속이 있으면 일찌감치 준비해서 약속 장소에 미리 도착하고, 나뿐 아니라 모든 식구들의 일과를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는 습관 정도랄까…... 뻔한 것들이긴 하지만 그런 것들만큼은 어려서부터 꽤나 몸에 잘 배어 있고 잘 관리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잘 안 되는 것이 있다면 이 역시 오랜 습관으로 어떤 일들에 있어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움직이고 만다는 것이다. 많은 상황에 그랬다. 공부할 때도, 직장 프로젝트를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늘 궁지까지 몰아넣은 상태에서 뇌를 닦달하고 그래야만 결과물이 완성되었다.

 

시험을 코앞에 두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믿거나 말거나 더 집중해서 효율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미리부터 공부를 시작하면 책상에 앉아 몽상에 빠지거나, 뜬금없이 책상 정리를 하게 되거나, 갑자기 미치도록 읽고 싶은 책이 나타나서 나를 괴롭혔다. 아무리 일찍부터 시험공부 스케줄을 짜도 결국 막판까지 와야 진짜 제대로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지표가 보였다.

 

이상하게 조금 넉넉히 여유를 두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시작부터 해보려고 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조차 잡히지 않는 경우들이 많았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정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고 머릿속이 캄캄하기만 할 때도 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막판의 “배수의 진"을 쳐야만 그제서야 고도의 집중력도 생겨나고 섬광처럼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매주 칼럼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혀 생각을 안 하고 배 째라 모드로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어떤 주제가 좋을까 평상시에 늘 염두에 두고 있고 마감 날짜가 가까워지면 곰곰이 고민도 하고 관련 데이터를 수집하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본격적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은 꼭 원고 마감 직전이다. 시험 직전 벼락치기 습관처럼 마감 직전이 되어야만 글이 써지고 진도가 나간다. 아마도 내 머리와 몸은 이런 패턴에 꽤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해야만 하는 상황까지 몰리면 그제야 초인적 힘을 내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물론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라고 인정한다.

 

솔직히 매주 올라오는 내 칼럼을 읽을 때마다 부족함이 여기저기 엿보이고 마음에 안 드는 표현들도 수두룩해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다음에는 더 일찌감치 글을 쓰기 시작해야지 하고 다짐도 여러 번 해보았지만 좀처럼 실천으로 연결되지는 않고 있다. 옆에서 보다 못한 남편이 평소 시간 개념이 없고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방법으로 시계를 한 시간 앞당겨 생활하듯 내게 마감일을 며칠 앞당겨 생각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시간을 한 시간 앞당겨도 그들은 계속 지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늘도 마감시간이 코 앞까지 다가온 상태에서 뇌를 독촉한다. 빨리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발등에 불이 꽤 뜨겁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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