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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04/20/20  

사십 대 중반, 통념적으로 생각했을 때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다소 이른 나이다. 부모님도 아직 건재하시고 자녀들도 아직 어리다. 그러나 죽음이란 너무나도 개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기에 이르고 늦다는 표현이 적절치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태어나는 순서는 있지만 죽는 순서는 없다고도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저 죽음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것은 "언젠가는 누구나 죽는다"라는 것이다. 평생 살 것 같지만 우리 모두는 한순간에 죽음과 마주한다. 어떤 생이든 끝이 있다는 것은 예외가 없는 불변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 아침, 눈 뜨자마자 확인한 문자가 부고 알림이었다.  미국에서 같이 성당을 다녔던 한 지인이 어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1975년생이니 나의 친오빠와 동갑이고 지난 금요일에는 사전 투표 인증샷을 본인의 SNS에 올리기도 했었다. 평소 지병도 없었던 터여서 그야말로 갑작스러운 죽음이라 오늘 부검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나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텁진 않았지만 혼란스러웠다. 아는 사람의 예상치 못한 부고를 전해 듣는 순간만큼 끔찍한 순간이 있을까? 처음에는 당황스럽다가 서서히 가슴이 먹먹해 온다. 그리고는 이내 상념에 잠긴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나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통하여 비로소 내 삶을 돌아보고 죽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어릴 때 너무 오래 살고 싶지는 않다고 늘 생각했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예술가들이 어쩐지 더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름다운 젊은 시절에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슬프고 애처롭지만 동시에 매혹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너무 늙고 병들어 하루하루 고통스러워하며 힘없이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부모님이 부쩍 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덜컥 죽음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지나가는 소리로 "아이고 나는 오래 살기 싫다. 아프면서 오래 살면 뭐가 좋냐.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지."라고 하면 막 화가 치밀었다. 어쩌면 자식 앞에서 저런 말까지 하나 싶어서 속상하고 원망스러웠다. 부모의 죽음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버겁고 고통스러워 모른 척하고 싶고 회피하고만 싶은 난제이다.

 

알고 있다. 죽음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죽음을 조금은 인식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죽을 텐데 아둥바둥 열심히 살아서 무엇하나? 될 대로 되라!’가 아니라 이 소중한 삶을 허무하게 보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소명의식으로 말이다. 죽기 싫어 사는 것이 아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 산다. 하루 하루를 진지하고 성실하게, 더없이 소중하고 의미 있게.  죽음이 있기에 우리 생은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도 말하지 않았는가!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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