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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세계
05/18/20  

요즘 매주 시청률을 갱신하고 있다는 인기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보고 나면 한때 영원을 약속하며 사랑했던 사람들도 지옥 같은 관계가 될 수 있고 처절한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 치게 된다. 영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했기 때문에 우리 문화나 실정에 맞지 않고 드라마적 요소가 많긴 하지만 지난날의 부부가 오늘의 원수가 된 이야기는 비단 드라마 속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물론 드라마 속에서는 간통이라는 확실한 귀책사유가 등장하지만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부부의 세계는 알다가도 모를 복잡한 세상임은 분명하다.



부부는 단순히 계약서에 도장 찍는 정도의 관계가 아닌 가장 강력하면서 아슬아슬 위태로운 두 사람의 약속을 기반으로 하고있다. 일일이 계약서에 명시하지 않아도 둘 사이에는 평생을 함께 하는 동안 이 정도쯤은 지켜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암묵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부부가 같이 살다 보면 이런 기대는 실망과 포기로 바뀐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달콤한 결혼 생활에 대한 로망은 "사랑이 변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와 함께 어긋나기 시작한다.



나 또한 이 지독한 부부의 세계에 살며 좌절하는 순간도 있었고 우울감이 차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그리 진보적인 신여성은 아닌지라 '남자인 남편이 힘쓰는 일, 기계 만지는 일, 좀 더러운 일 (화장실 청소, 화분 관리, 음식물 쓰레기 폐기)은 주도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 남편 또한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내가 육아, 자녀 교육 및 소소한 아이들 문제, 가사와 살림 등은 알아서 해주길 바라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업무 분담이 그리 깔끔하고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리가 있는가! 늘 뭔가 내가 손해 보는 기분이고 상대방은 뒷짐지고 구경하는 것 같아 신경에 거슬린다. 이상하게 부부의 세계에서는 치사하리만큼 집요하게 “과연 누가 더 잘못했는가”, “누가 더 힘든가”, “누가 먼저 시작했냐?” 와 같은 초등학생처럼 유치하고 쪼잔한 문제에 집착하게 된다.



남편이라고 매일 힘든 일, 더러운 일을 자처하고 싶겠는가? 아무리 남자라도 무거운 건 무겁고, 더러운 건 똑같이 더럽다. 나 또한 여자이고 엄마라고 허구한 날 독박 육아를 하고 싶겠는가? 여자도 가끔은 쉬고 싶고 해방되고 싶고 나만의 삶을 살고 싶다. 이런 와중에 생활이 힘들어지고 경제적으로까지 힘들어지면 부부의 세계는 더욱 거세게 흔들린다. 행복해지려고 결혼을 했는데 어째 더 불행해진 것만 같아 우울하고 둘이 되면 덜 외롭고 덜 힘들 것 같았는데 더 외롭고 더 힘든 것 같아 미치고 팔짝 뛰는 것이다. 나도 예외일 수 없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의 부부들이 이런 유사한 일 때문에 싸우고 힘들어하고 심한 경우 헤어지기 까지 하는 것을 많이 봤다.

 

나는 결코 이 분야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 문제의 솔루션은 의외로 간단하다. 배우자를 통해 뭔가를 얻으려는 (그것은 행복이나 기쁨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돈과 명예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바람을 내려놓으면 조금은 수월해진다. 식상할 정도로 너무 뻔한 소리라는 것도 알지만 내가 볼 때 이만한 방법이 없다. 내 행복의 주체가 배우자가 아닌 내 스스로가 되면 된다. 나의 행복과 불행이 오직 배우자 손에 달렸다면 이보다 더 아슬아슬한 삶이 어디 있으랴. 그것은 상대방에게도 너무 가혹한 짐을 안겨주는 셈이다.



남편은 퇴근길에 나를 자주 불러낸다. 어제도 불렀고 그제도 불렀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산책 가자, 마중 나와라, 눈이 온다, 비가 온다, 기분이 별로다, 쇼핑 가자 등등…... 이유는 다양하다. 가끔은 피곤하기도 하고 아이들 때문에 정신없는 저녁 시간이기에 사양하고도 싶지만 열심히 물어봐 주는 게 고마워서 나도 열심히 불려나간다.  연애 4년, 결혼 16년 도합 20년인데 아직도 나와 어울리고 노는 것을 그럭저럭 좋아해주는 것 같아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부부는 오랜 시간 함께해야 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코드가 잘 맞아야 하는데 우리는 제법 죽이 잘 맞는다. 패션, 문화, 음악, 음식 코드는 둘째치고 웃음 코드 정도는 맞아줘야 인생이 즐겁지 않겠는가. 부부의 대화가 무미건조하고 지루하다면 함께하는 시간이 곤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행히도 남편의 유머 코드는 나와 잘 맞는다. 나는 아직도 남편이 그렇게 웃기다. 남편과의 대화가 흥미롭고, 남편과의 데이트가 설레고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다. 그리고 앞으로 딱 50년만 더 나를 웃게 해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오늘도 아슬아슬 오묘한 부부의 세계를 지켜내고 있는 수많은 부부들을 응원합니다. 마침 돌아오는5월 21일이 한국에서는 부부의 날이기도 하네요. 이번에는 제가 남편을 먼저 불러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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