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06/01/20  

“뭐라고?” 아직 내가 그럴 나이는 아닌데 가는 귀가 먹었다고 해야 하나 가끔 말을 잘 못 들을 때가 있다. 제대로 듣고도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니 말귀가 어둡거나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은데 분명 매우 비슷하지만 다르게 들릴 때가 자주 있다. 특히 웅얼웅얼 입을 작게 벌리거나 발음이 부정확한 사람이 하는 말은 심각할 정도로 못 듣는 경향이 있어서 항상 더 신경이 쓰인다.

 

귀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워 건강검진 때 하는 청각 검사 때도 내심 걱정했으나 정상이라 했고 귀지가 많아 고막을 막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이비인후과 검사도 받아봤지만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귀 속이 깨끗했다.  정상이라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동안 제대로 듣지 못해서 생긴 에피소드가 아흔아홉 가지는 족히 될 것이다.

 

최근에 있었던 가장 따끈따끈한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나는 퇴사 후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며 온라인 사업을 런칭하였는데 자신 있게 칼은 뽑았는데 내심 이런저런 걱정과 스트레스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사업 시작하고 일주일이 갓 지났을 무렵인가보다. 남편은 한창 출근 준비 중이고 나는 기상 후 아직 침대에서 폰을 들여다보며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남편이 갑자기 "그래서, 오늘 자기 매출 계획은 어때?"하고 묻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뭐라고? 이제 막 눈 뜬 사람한테 이렇게 갑작스럽게 훅 들어오남? 사업 시작한 지 겨우 일주일 되었는데 벌써 매출 압박이 들어오는 것인가?' 싶었다. 자영업하면서 좋은 거 딱 하나, 윗사람 눈치 안 봐도 되는 것 그거 하나 좋은 것인데…... 남편이 회사 상사보다 더하는구나 싶어서 가슴이 고구마 열 개 먹은 듯 답답해 왔다.

 

아주 잠깐 동안 정말 만감이 교차했고 마땅히 할 말이 없어 "아 몰라~! 그런 걸 뭘 벌써 계획을 해?"하고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남편이 멋쩍은 듯 "아니…... 자기가 어제도 외출하고 하길래 오늘도 어디 가나 싶어서…...."하는 것이었다. 아뿔싸! 매출이 아니고 외출이었구나! 이런 식으로 비슷한 발음이거나 초성이 같은 단어들은 부쩍 잘못 알아듣는 경우가 생긴다.  어쨌든 짜증스럽게 대꾸한 게 미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일단 그렇게 대화는 종료되었고 며칠 지난 후에야 사실은 그 때 내가 또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고 고백했다. 

 

20대 때부터 남편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렇게 안 들리면 차라리 보청기를 알아보는 게 어때?"라고 말해왔는데 며칠 전 에피소드를 고백했을 때도 남편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일찌감치 보청기를 알아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말귀를 잘못 알아들어 생기는 에피소드의 90%는 남편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이런 문제가 있었던 기억이 거의 없다. 20대 때 내 귀가 어두운 것 같다고 처음 말 한 사람도 바로 지금의 남편이고 나를 이비인후과까지 가게 만든 장본인도 바로 남편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하는 부부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유독 남편 말만 잘 못 알아듣는 것은 분명 나만의 잘못은 아닐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남편보다 더 듣기 어려운 분이 한 분 계시다. 그렇다! 이제 모든 퍼즐이 맞추어 졌다. 내 청각의 문제이기 보다는 남편의 핏줄이 문제일 수 있다는 소름끼치는 사실. 내가 사실 세상에서 제일 못 알아듣는 분은 다름 아닌 시아버지인것이다. 매번 “네?” 할 수가 없어서 “네”하고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한 마디에서 두 마디, 세 마디, 네 마디 못 듣는 수가 많아졌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며느리를 보며 인자하게 웃으며 말씀하시는 아버님을 보면 죄송스러운 마음이......죄송해요. 실은 잘 안 들려요.

 

세상에는 작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 또박또박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남편의 주장대로 내 귀가 어두워서인지는 모르지만 난 후자에 속하고 남편은 전자에 속한다. 남편의 목소리가 작으니 내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남편은 내 소리가 잘 들리니 더 작게 말하는 악순환이 계속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0년 후에 과연 내 목소리는 얼마나 더 커지고 남편은 얼마나 더 작아질까? 우리 아이들은 둘 중 누구를 더 닮아갈까? 갑자기 매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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