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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내비게이션
06/15/20  

미국으로 이주해 제일 처음한 일은 소셜 시큐리티 번호를 받는 것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날 사회보장국에 가서 번호를 받고, 바로 그 다음날 운전면허 시험장에 가서 면허를 땄다. 그리고 자동차를 산 다음 코스트코에 가서 지도책(토마스 맵)을 한 권 샀다.

 

동서남북을 분간하지 못할 때라 언제나 어딜 가든 떠나기 전에 토마스 맵을 펼치고 한참 들여다 본 후에 출발했다.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을 헤매다가도 토마스 맵을 펼쳐 놓고 가야 할 길을 찾다보면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몇 년에 한 번씩 새로 구입했다. 지도책이 너덜너덜해져서 더 이상 보기 힘들게 되고 도로가 새로 생기거나 바뀐 구간들이 있어 개정된 지도책을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처음 맞이한 봄방학에 아이들과 함께 긴 여행을 계획했다. 101번 도로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레이크 타호’로 갔다가 요세미티에 들렸다 내려오는 거창한 계획을 세울 때도 지도가 곁에 있었다.

 

각 지역과 도시 별로 지도를 잔뜩 구해 여행 중에도 펼쳐 놓고 어느 도로로 갈 것인가 의논했다. 특히 눈이 많이 내려 레이크 타호에서 요세미티로 가는 길이 봉쇄되었기 때문에 지도는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다. 지도가 없었다면 꽤 고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지도가 필요 없게 되었다. 내비게이션의 보급으로 목적지를 입력하면 큰 화면으로 가고자 하는 길을 찾을 수 있고, 자신이 가는 길을 훤히 들여다보면서 갈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가는 길에 교통 정보도 얻을 수 있으니 예전에 펼쳐들고 찾던 토마스 맵보다 훨씬 더 편해졌다.

 

게다가 이제는 스마트폰에 설치된 내비게이션으로 길을 찾으니 자동차에 장착된 내비게이션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친절한 목소리로 안내까지 해 주니 토마스 맵을 들여다보고 길을 찾던 그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편리하다. 인공위성이 순식간에 쏘아주는 내비게이션의 길 안내는 아날로그 세계에서 디지털 세계로 이동한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주는 길은 정확하다. 목적지까지 확실하게 안내해 준다. 내비게이션만 믿고 따라다니다 보니 길 찾는 실력이 퇴보될 지경이다. 하지만 편안하고 정확하게 안내해 주니 불평할 일이 전혀 없다.

 

내비게이션과 더불어 편하게 살다가도 가끔 두꺼운 지도책을 펼쳐놓고 진지하게 길을 찾던 그 시절을 생각해 본다. 몇 배로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애써 땀 흘리는 노동을 통해 얻는 보람이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단순했지만 순박했던 시절이었다. 몸으로 모든 것을 때우고 마음 편하게 살던 시절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그립기도 하다.

 

지상의 길을 부지런히 내비게이션에게 물으며 다니는 동안 조금씩 마음속에 의문이 생겼다. 인생의 길은 어떻게 찾는가? 또 마음의 길은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애초부터 인생과 마음 길을 찾아주는 토마스 맵은 없었으니 내비게이션이 있을 리도 없다. 목적지에서부터 경로까지 길을 찾아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문제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사는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바로 이것이라고 딱 꼬집어서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인생살이에 정답이 없다보니 선택의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때그때 어느 한 길을 선택하면서 살아간다. 심사숙고해야 하지만 오래 생각한다고 좋은 결정이 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의 경로는 페이지를 한장 한장 넘겨가며 찬찬히 찾는 토마스 맵으로도, 입력함과 동시에 화면에 뜨는 내비게이션을 통해서도 찾을 수 없다.

 

결국 자신의 선택한 길로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번 선택한 인생길은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과거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기보다 현재 걷고 있는 길을 더 열심히 걷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그리고 만일 내가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처한 상황에 가장 적합한 또 다른 길을 선택해 걸으면 된다.

 

세상의 길은 유한하지만 인생과 마음의 길은 무한하게 열려 있다. 그 무한한 길 가운에 하나를 선택할 때마다 ‘과연 내가 가고자하는 목적지로 향하는 바른 길일까?’하는 의문이 들고 두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길을 선택해야 하고 스스로 지도나 내비게이션을 만들며 걸어야 한다. 이렇게 기록된 한 사람의 인생의 경로는 또 다른 사람에게는 토마스 맵이나 내비게이션이 되기도 한다. 오늘도 나를 위해, 그리고 내 삶의 경로가 누군가의 내비게이션이 될 수도 있기에 부지런히 걷는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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