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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국을 끓이며
06/15/20  

우스갯소리로 엄마가 큰 솥에 곰국을 끓이면, 하루 이상 집을 비운다는 신호라고들 한다. 하지만 고깃국을 좋아하지 않는 엄마 덕분에 나는 어릴 적 곰국을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엄마는 미역국이나 콩나물국도 홍합이나 조개를 넣어 시원하고 개운하게 끓여내는 스타일이셨다. 나 역시 그 맛이 최고라고 믿으며 자라왔다.

 

그런 내가 중2 때 미국에 건너 가 한인타운에서 처음 먹었던 설렁탕은 정말 신세계의 맛이었다. 나의 음식 기호는 고깃국을 먹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말 어찌나 맛있던지 그동안 이렇게 맛있는 걸 못 먹어 본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아 고기로 국물을 내면 이렇게 맛있을 수 있구나를 깨달았고 한동안 한 달에 두세 번은 꼭 설렁탕을 먹었던 것 같다. 생 파를 먹기 시작한 것도 깍두기를 유난히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고깃국은 파와 깍두기를 만나야 완벽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시기, 1년 남짓 할아버지께서 우리 남매의 보호자 역할을 해주셨는데 그때 할아버지는 매일같이 곰국을 끓여주셨다. 미국에 오니 사골이며 소꼬리, 각종 뼈들이 너무 싸다며 신이 나서 곰국을 끓여주셨는데 처음에는 너무 맛있어서 한 사발씩 들이마시듯이 먹었는데 나중에는 곰국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지금도 할아버지가 가스레인지 앞에서 곰국을 끓이시는 뒷모습이 여전히 나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다. 그때 곰국은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아무리 덥고 힘들어도 할아버지는 묵묵히 곰국을 끓이셨다.

 

사실 곰국은 만들기 그리 간단한 음식이 아니다. 무거운 사골뼈들을 사다가 찬물에 최소 다섯 시간 정도 담가 핏물을 빼고, 잡내 제거를 위해 한 번은 초벌로 끓여 찌꺼기 많은 국물을 다 버리고 다시 새 물을 받아 뽀얗게 국물이 우러날 때까지 댓 시간은 펄펄 끓여낸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검은 불순물이나 기름은 국자로 수차례 걷어 내며 물과 불을 계속해서 조절하며 끓여내야 완성된다. 특별한 기술을 요하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꽤나 정성이 들어가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쌀 씻은 물처럼, 우유처럼 뽀얀 색을 내기 위해서는 정말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솔직히 효율성만 따지자면 그냥 설렁탕집에서 포장해서 먹는 편이 훨씬 낫다고 백 번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 곰국을 끓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국에 온 지 3년 차인데 한국에서 처음 끓여보는 곰국이었다. 푹푹 찌는 더위가 오고 있고 가족들에게 보양이 될 만한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가족들을 위해 정성이 담긴 음식을 한 번 만들어 보자는 의미도 있었다.  어쩐지 하루 종일 고기의 핏물을 빼고 예닐곱 시간씩 끓이고 공들인 선물 같은 음식을 선보이고 싶었다고나 할까…… 조금만 무리해도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프다는 남편, 무더위에 중학교 신입생으로 첫 주를 맞이한 큰 아들, 코로나로 인해 1주일에 한 번 하는 등교를 손꼽아 기다리는 둘째와 셋째, 오랜만에 시작된 유치원 종일반 생활이 재미있긴 하지만 그래도 주말만 기다리는 우리 막내를 생각하며......

 

가족들에게 곰국을 한 사발씩 퍼주며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이 귀한 걸 다시는 못 먹을 줄 알았다면 그때 그렇게 대충 먹지 말 걸. 너무 먹어서 이제 그 누릿한 냄새가 지겹다며 국물을 남기지 말 걸. 늘 그렇듯이 어리석은 때늦은 후회와 함께 말이다.

 

* 지난주 칼럼 제목과 마지막 문단에서 "I can't breathe"를 “I can't breath”라고 적는 실수했네요.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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