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애 넷 맘의 흔한 출산 스토리
06/22/20  

6월 19일, 오늘은 셋째 아이의 생일이자 내가 세 번째로 아이를 낳은 날이다. 아이를 낳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용담 비슷한 출산 스토리가 있기 마련이고 여자들에게 출산 경험담은 남자들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만큼 내밀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엄마들만의 주제라고 해 두자. 네 번의 출산을 경험한 나는 군대로 비교하자면 툭 치면 관등성명이 나오는 어리바리 훈련병이 아니고 산전수전 육탄전을 다 겪은 제대 날짜도 세지 않는 깔깔이로 목례만 해대는 말년병장 정도 되지 않을까......

 

9년 전 그날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세 번째 출산은 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희한하게도 첫 번째 출산의 고통은 더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생생히 기억한다. 오후 4시쯤부터 시작된 진통이 밤이 되면서 심해졌고 더 이상 못 참겠다 싶었을 때 일주일 전부터 싸놓은 짐가방을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파서 온몸을 비틀며 진통을 해도 시큰둥 반응하던 간호사들은 자궁문이 2cm 정도밖에 열리지 않았다며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애는 원래 하늘이 노래지게 아파야 나오는 거라더니 정말 천장이 노래질 때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17시간이 넘는 정말 난생처음 겪어보는 고통을 겪으며 첫 아이가 태어났다. 수많은 고통을 출산의 고통과 비교하는 이유를 그제야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출산이었던 막내도 그럭저럭 잘 기억이 난다. 진통 속도와 진행이 빨라 아침에 첫 진통을 느끼고 병원에 갔을 때 이미 자궁이 10cm나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틀 전 검진 때도 멀쩡했던 아이가 갑자기 거꾸로 있었던 덕분에 제왕절개를 해야 했으니 너무 억울해서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둘째와 셋째는 연년생이라 연달아 출산을 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기억과 느낌들이 뒤섞여 정확히 누구 때 겪은 일인지 기억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종종 남편과 나는  "병원 가는 길에 ATM에 들렸던 게 셋째 때인가?", "그럼 내가 못 참겠다고 고속도로에서 출산할 것 같다고 그랬던 건 둘째던가?”와 같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어쨌든 확실히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처음보다는 능숙하고 여유 있게 아이를 낳았다고 기억한다.

 

첫째와 둘째와 달리 셋째는 열흘이나 빨리 나왔다. 17일 금요일까지 평소처럼 출근해서 일을 하고 직원들과 "월요일에 만나" 인사를 했건만 6월 19일 일요일 새벽, 자다가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이미 두 번의 출산을 경험했지만 양수가 터진 것은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진통은 없었기 때문에 꽤 침착할 수 있었다.  양수가 터지면 세균 감염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샤워를 하지 말고 바로 병원으로 직행해야 한다고 글로 배웠지만 차분히 샤워도 하고 짐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셋째는 6월의 세 번째 일요일인 Father's day baby로 선물처럼 우리에게 와 줬다. 생애 마지막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세 번째 출산 이후 3년 뒤에 나는 다시 같은 병원, 같은 의사와 함께 분만실에 누워 있었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는 엄마의 찢어지는 고통과 신음 끝에 세상의 빛을 본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의술이 발달해도 이는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다. 아무리 무통분만, 제왕절개 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결국 모든 어머니들은 임신이나 출산 과정 중에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갖은 고통을 경험한다. 어쩌다가 종이에 살짝 베이고 발목이라도 살짝 삐끗해도 아프다고 난리지만, 온 뼈마디가 틀어지고 극심한 통증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이 오그라들며 유혈이 낭자한 출산에 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듯 대단한 나의 출산 스토리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온 천지에 결국 나뿐이다. 어쩌면 남편도 자식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고 사라지는 나만의 전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고한 출산의 고통을 통해 탄생한 한 명 한 명의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만하면 되었다 싶다. ‘나는 장한 엄마다’라고 나 자신을 쓰다듬어도 본다.

 

그리고 아직도 나에게는 아흔아홉 개의 출산 스토리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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