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 시비
07/20/20  

본보 1137호(2016년 12월 12일자) 칼럼에서 내 스승인 고원 시인에 대해 얘기했다. 그해 11월 초 고원 시인의 고향인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를 찾아 갔으며, 박계리 이장을 만났고 학산면사무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영동군청 관계자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선생님의 10주기에 맞춰 영동에 '고원 시비'를 건립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후 고국 방문시마다 고원 시비 건립을 위해 영동군청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의 10주기인 2018년에는 1200호 칼럼에서 ‘고원 선생 10주기에’라는 제목으로 고원 시비 건립에 진전이 없음을 고백한 바 있다.

 

그러던 중 지난해 고국 방문길에 만난 중고 동창생 석광훈 신부에게 고원 시인의 고향 영동에 시비를 세우려 한다고 얘기했다. 이후 그는 발 벗고 나서서 군청에 건의를 했고 고원 시인 시비 건립을 위해 여기저기에 협조를 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원 시인이 1952년 3인 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을 발표한 이후 한국 현대문학사에 남긴 업적과 도미 후 미국 내에서 한국 문학의 뿌리를 내리고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면서 후학 양성에 노력한 업적을 기려 그의 고향에 시비를 세우려 한다는 고귀한 뜻이 전달되어 지난 6월 11일 영동군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영동군청 국악문화체육과 박상희 주무관은 고원 시인의 시비 제작에 관해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면서 시비 건립에 대한 질의서를 보내왔다. 질의 내용은 시비 설치 장소, 시비 제작 및 설치 비용, 시비의 크기 및 시비에 들어갈 내용, 시비 건립 이후 관리 방법 등이었고, 이에 응답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7월 12일, 박상희 주무관은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송호국민관광지 내 와인테마 마을 공연장 부근을 시비 건립 예정지로 선정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박 주무관은 송호국민관광지에는 이미 권구현, 구석봉, 이영순등 영동 출신 문인들의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들 시비는 개인 소유의 부지에 세워져 영동군이 관리하지 않는다고도 전했다. 그는 송호관광지는 개인 소유의 부지와 영동군 소유의 부지가 혼합되어 있는데, 고원 시비가 세워질 곳은 영동군 소유의 부지이며 시비 건립 후 기부 채납되면 영동군이 시비를 관리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라북도 장수 뜸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진안, 무주를 지나 충북 영동 양산면을 지난다. 바로 이 양산면을 지나는 금강 줄기를 영동 사람들은 양산강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양산강변에 위치한 송호국민관광지에 고원 시비 건립 부지를 선정했다니 참 반가운 일이다. 이곳은 소나무 숲과 주변 경관이 좋아 양산 팔경 금강둘레길의 시작 지점이기도 하다.

 

선생님은 그의 시 ‘물길’에서 아들이 하는 일을 걱정하시던 어머니를 그리면서 ‘민주주의 되면 고향산천 충청도 산골, 양산강 통해서 오실까요.’라고 이 양산강을 언급한 바 있다. 바로 그곳에 선생님의 시비가 세워진다하니 더욱 감개무량하다.

 

1964년 도미해서 1988년 귀국(일시 방문)할 때까지 24년 동안 선생님은 단 한 번도 고국을 찾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 ‘조국을 등진 시인’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사실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었기 때문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세력들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었으며, 여권조차 빼앗겨 해외여행 자체를 할 수 없었다. 뉴욕 영사관에 여권 유효기간 연장 신청을 했다가 오히려 여권을 압수당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선생님은 일본과 서독을 방문할 때도 미국이민국으로부터 재입국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이 허가증의 국적란에는 무국적으로 기입돼 있었다고 저서 ‘갈매기’에서 밝힌 바 있다. 또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인해 죄 없이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몹시 슬퍼했으며, 정치권력과 그들의 노예로 전락한 사법부에 대해서 분노했다. 같은 해 ‘김지하의 벗’이라는 단체를 창설해서 대표로 활동했으며, 미주 민주국민연합 사무국장을 거쳐 1979년 말에는 회장을 맡는 등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선생님은 단 한 번도 글공부 시간에 정치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글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고, 글이 지나치게 정치적이나 종교적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했다. 글은 의지나 사상을 담되 비유를 통해 드러내야한다면서 직설적인 표현으로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생각을 획일화 시키려는 의도는 사회분열을 조장할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 선생님은 정치적인 이유로 한국정부기관으로부터 감시당했고, 여권을 빼앗겼고, 고국을 방문할 수조차 없었다.

 

선생님은 사후 미국에 묻혔다. 하지만 비록 육신은 미국에 있더라도 시비 건립을 계기로 선생님께서 생전에 외쳤던 사회정의와 문학 정신은 고국 땅 대한민국에서 솔향처럼 은은하게 퍼져나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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