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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08/17/20  

빠르다. 빠르다. 제 아무리 빠르다한들 세월보다 빠른 것이 있을까? 8월도 중순을 지나 하순으로 치닫고 있다. 초복 즈음해서 직장 동료들과 백숙을 먹으며 더위를 이기자고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중복을 지났고, 가을의 입구에 들어선다는 입추(8월 7일)를 지나 말복(8월 15일)도 지났다. 곧 처서(處暑)다. 글자 그대로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 한국의 절기가 캘리포니아에서 적용될 리 없음을 알면서도 갖다 붙이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27년이 지났어도 이민자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살고 있다.

 

4월 중순에 있었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일주일에 두 차례씩 통원치료를 받으며 힘들게 버티고 있었는데 급작스럽게 이보다 더 큰 엄청난 일을 겪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나의 외손자 서준이가 선천적 뇌동정맥 기형으로 인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13살 어린 아이가 뇌출혈이라니. 믿겨지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아이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삶에 대한 시각도 많이 달라졌다.

 

나의 어머니는 암 수술을 받았고, 항암치료를 통해 암 퇴치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어 수술 후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해 양로병원에서 3년 가까이 생활하다가 90세에 세상을 떠났다. 언제나 죽음을 삶의 한 부분이라 생각했기에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도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갑작스런 죽음은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를 어떻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지난 토요일, 나도 모르게 발길이 공원으로 향했다. 손자들과 함께 자주 걷던 공원이다. 오랜만에 찾았다. 내려 쬐는 태양을 즐기며 모자도 쓰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서준이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듣고 곧 별일이 아니라는 기별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다음 소식은 의사들이 ‘수술을 해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얘기한다면서 그래도 수술을 한다고 했다. 이어서 수술을 마쳤으나 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다. 혹시 생명을 건지더라도 정상적인 상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그래도 훌훌 털고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처럼 간절하게 기대하던 소식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심정지가 계속되어 6번이나 전기충격을 가했으나 아이는 소생하지 못하고 먼길을 떠났다는 소리에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믿을 수 없었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멀쩡했던 아이가 갑자기 쓰러져 그 다음날 저세상으로 가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 아픈 데가 있었다거나 시원찮은 데가 있었다면 모르겠는데. 아주 건강한 아이였다. 태권도 유단자였고, 4학년 때 한국으로 가서 5학년 때 전교 어린이회 부회장에 출마해 당선될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4남매의 장남으로 가정에서 쓰레기 분리수거 담당으로 어른들도 하기 힘들어하는 일을 맡아서 했고, 동생들을 잘 보살피던 아주 유쾌한 아이였다.

 

어느 날 공원을 걷고 나서 우리는 인앤아웃으로 몰려갔었다. 깔깔 웃으며 동생들과 장난치며 치즈버거를 먹던 아이가 눈에 선하다. 아이는 한국에 가서도 잘 적응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한 번은 ‘할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서 할아버지 집에서 살겠냐?’고 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잘 적응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제 나름으로는 힘든 구석이 많았던 모양이다. 후에 들으니 한국생활이 힘들다며 담임선생님과 상담도 몇 차례 했다고 했다. 무엇이 가장 힘든가 물으니 아이들의 ‘거친 말과 욕’이 참기 힘들었다고 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10년을 살다가 한국에서 생활하자니 어렵고 힘든 일이 한두 가지였겠는가. 많이 힘들었을 거다.

 

사람들이 호숫가를 분주히 걷고 있다. 테니스 코트에서는 사람들이 힘차게 공을 주고받고 있었고, 놀이터의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쉴 새 없이 뛰어다닌다. 서준이가 그 속에 있다.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며 깔깔 웃는다. 미끄럼틀에서 내려온 녀석이 내게 달려와 품안으로 쏙 들어온다. ‘할아버지!’

 

아이가 저 하늘의 별이 된 지 벌써 18일이 지났다. 그래도 여전히 슬픔은 내 곁에 머물고 있다.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른다. 분명히 시간이 해결해주긴 할 텐데 아직은 아닌가 보다. 딸의 전언에 의하면 서준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Legends never die"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서준이는 전설이 되어 우리들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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