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
09/21/20  

어려서는 세상에는 평등이 존재하다고 믿었다. 언젠가는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과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 다 벌거벗고 왔다가 벌거숭이로 간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에 입각한 만민평등론이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쫓겨 난 후 어머니가 사방공사 현장에서 돌을 나르고 화장품 가방을 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판매를 하고, 내가 우물에서 지게로 지고 날라온 물을 부운 물독에서 지렁이가 헤엄치고 우연히 빠트린 밥알에 털이 달린 걸 보면서도 우린 그 물을 맛나게 마시며 살았다. 장마 때는 천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보면서도 누구나 평등하다고 믿었다. 그때 내가 살던 빨랫골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살았으니까. 아랫집 현수네도 그랬고 윗집 기범이네, 옆집 영숙이네도 모두 그렇게 살았기에 세상이 모두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중학교에 진학해 납부금이 밀려 담임선생님께 시달리면서도 크게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짝꿍인 수유리 사는 평두, 맨 뒤에 앉은 곤지암에서 유학 온 봉균이, 돈암동 고개 마루턱에 살던 광훈이도 그 속에 있었다. 한 반에 스무 명 남짓 매 분기마다 집안 형편을 걱정(?)해주는 담임선생님과 면담했으나 우린 연중행사쯤으로 알았다. 오히려 교장 교감에게 시달릴 담임선생님을 걱정했다.

 

고등학교 3학년, 고문 시간이었다. 학생들의 절반 정도는 졸고 있었다. 목이 터져라 열강하는 선생님을 딱하게 여겨 엄습하는 잠을 참아가며 버티고 있었다. 선생님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며 졸고 있던 찬후를 앞으로 나오라 했다. 선생님은 다짜고짜 손바닥으로 찬후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내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선생님, 왜 찬후만 때립니까? 다른 애들도 졸고 있었고, 수준이는 지금도 자는데요.” 소동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단잠에 빠져 있는 수준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선생님은 얼굴이 빨개졌다. “너 나와.” 나는 튕기듯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선생님이 말했다. “교무실에 가 있어.”

 

이때 알았다. 세상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졸고 있는 상당수의 학생 가운데 재수 없게 걸리면 뺨따귀 세례를 받고 운 좋은 놈은 졸던 놈이 싸대기 맞는 줄도 모르고 자는 세상.

 

복학생 중에 장가간 형이 있었다. 그 형은 커다란 양옥집에 형수와 둘이 살고 있었다. 방이 네 개나 되는 큰 집이었다. 아버지가 도정업을 한다고 했고, 전북 어느 지역의 국회의원이라고 했다. 나도 대학 4학년 때 결혼을 했다. 나는 문간방 셋방살이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길가 쪽에 나있는 부엌문으로 드나들어야 하고 화장실, 아니 변소도 주인집 대청마루를 통과해 대문 옆에 있는 걸 사용해야 했다. 그 집 대청마루에도 화장실이 있었지만 주인집 식구들만 사용했다. 부엌문으로 나가서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편이 편했지만 주인집에서 대문 열쇠를 주지 않아 부득이 그 집 마루를 통해 드나들어야 했다.

 

예전에는 공정이니 평등이니 하는 것을 별로 따지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의 능력에 의해 직업과 신분이 결정되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 들였다. 그러나 세상은 본래 평등하지 않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느 한 가지라도 평등한 것이 있던가. 누구에게나 기회가 똑같이 주어졌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누구의 아들딸로 태어나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생겨난 말들이 아빠 찬스, 엄마 찬스라는 말인가 싶다.

 

부모를 잘 만나면 편안하게 평생 호강하며 살다가고, 어떤 이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 고생만하다 가지 않던가.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도 그렇다. 날 때부터 명석한 두뇌와 잘 생긴 외모로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평생 사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언제나 바닥을 긁으며 헤매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죽음에도 평등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누구나 평등하다면 착한 사람이 젊어서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엄마 아빠가 대학교수인 자녀들이 부모의 도움으로 좋은 스펙을 쌓아 원하는 대학에 간 것이 불평등하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인가? 어쩌면 이 세상이 본래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이 평등을 외치는지도 모른다. 진짜 세상이 평등하다면 평등을 외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헌법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분명히 밝히면서,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본래 세상이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평등을 염원하는 것이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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