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너머
09/21/20  

창문을 연다. 시원하다 못해 선선해서 입고 있던 단출한 여름 실내복이 이제 너무 헐벗은 느낌이다. 벌써 가을이라니! 우리집 어느 창문이든 저 멀리로 산이 보이는데 요즘 대기가 어찌나 선명하지 과장 좀 보태서 나무 수를 셀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렇게 화창하고 바람 좋은 날은 당연히 창문을 열어두는 게 좋다. 요즘에는 습도도 적당하고 바람도 적당해서 창문 열 맛이 난다고 할까? 마음껏 환기를 할 수 있으니 한동안 세수만 하다가 오랜만에 사우나에 다녀온 것처럼 속이 다 시원하다.   

 

따져보면 사실 일 년 중 창문을 활짝 열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다. 봄에는 꽃가루에 미세먼지, 여름에는 덥고 습해서, 겨울에는 추워서 창문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게 되니 일 년 열두 달 중 겨우 한두 달쯤 되려나? 작년만 해도 봄과 가을이면 황사, 미세먼지 등으로 창문 열기가 조심스러웠는데 올해는 미세먼지 양호한 날이 어찌나 많은지 조금은 심술궂게 느껴질 정도다. 코로나19 시대로 이렇게 날이 좋아도 마음껏 외출할 엄두도 내지 못하니 안타까워 드는 생각이다.  

 

창을 열어 두니 창이 닫혀 있을 때는 전혀 몰랐던 시각, 청각, 촉각 등의 다감각적인 정보들이 물밀듯이 몰려든다. 우선 끼니때가 되면 이웃집 음식 냄새가 올라온다. 어제는 고등어찜, 오늘은 김치찌개. 메뉴도 참 다양하다. 아파트 단지 내 나무가 이리 많았나? 마치 깊은 숲속처럼 수림에서 풍기는 향도 올라온다. 다양한 소리도 바람에 실려 들어온다. 새벽 5시 무렵부터 시작되는 묵직한 트럭이 내는 소리는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청소차나 쓰레기차쯤 되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1층에서 리모델링 공사를 한다더니 요즘 매일매일 요란하다. 빨래 대에 걸어둔 옷걸이가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뛰어가는 소리, 도시가 품고 있는 차 소음과 기계 돌아가는 소리 등등 창문 밖 세상은 소리만으로도 참으로 분주하다.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당시 내 나이쯤이었던 엄마는 점심과 저녁 사이 늦은 오후 해가 저물기 전 부엌 싱크대 위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부엌 창문이 그리 크지 않은 데다가 우리 집이 3층이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고작해야 아파트로 드나드는 차들과 오가는 주민들이 전부였을 텐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늘 그곳에 계셨다. 30년 전 우리집 부엌 창문을 떠올리면 지금도 어린 내 후각을 간지럽히던 부드러운 커피 향과 엄마의 쓸쓸한 뒷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엄마가 창밖을 내다보는 모습은 마치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도 어느새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창밖을 보며 하루 일을 정리하기도 하고 설거지할 때 아이가 내게 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기도 하고 오늘 아침 잔뜩 꺼내 두고 폐기하지 못한 쓰레기들은 언제 갖다 버리나 심난해지기도 한다.  곧 다가오는 추석, 그리고 또 막내의 생일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다. 언제부턴가 내게 창문은 더 이상 그저 창문이 아니다. 창밖 너머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감동이 북받쳐 올라오기도 하고 내 가슴 곳곳에 서리가 내리기도 한다. 

 

오늘도 창밖을 내다본다. 산과 하늘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눈 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잘 버텨서 장하다고 나를 위로한다. 다 괜찮다고, 힘내라고 나를 격려한다. 오늘은 그렇게 창밖 너머로 펼쳐진 하늘에 안겨 하염없이 위로 받는다. 하늘은 그저 조용히 품어줄 뿐이다. 그 옛날 엄마도 그렇게 매일 위로 받고 있었던 것이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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