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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흔적
09/28/20  

금요일 저녁,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주차장에 만든 간이 야외 식당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곱창전골을 시켰다. 배불리 먹고 마시다 보니 어둑어둑해졌다. 친구가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혼자 테이블을 지키고 앉아 있기 싫어 따라 나섰다. 한 개비 달라하니 눈이 둥그레진다. "아니, 담배 안 피우잖아?" "괜찮아, 바람 쐬면서 한 대 피우지 뭐." 한 모금 깊이 들이마셨다가 뱉는다. 오랜만에 담배를 피우니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를 빨아들일 때마다 입술에 뜨거운 불기운이 느껴진다. 꽁초를 버리려하니 재떨이가 없다.

 

예전에는 인체에 미치는 유해함에 대해 홍보가 부족했던 탓인지 담배 피우는 사람이 많았다. 보이스카우트 지도자들도 대부분 담배를 피웠고, 야영장에서도 모이면 피웠다. 그리고 꽁초를 아무데나 던지지 않고 자기 담뱃갑에 넣었다가 쓰레기통에 버렸다. 보이스카우트는 자연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철칙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자연친화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꽁초에 남은 담뱃잎을 모두 자연으로 돌려보낸 다음, 담뱃잎을 싸고 있던 종이와 입술이 닿았던 필터 등을 최대한 갈기갈기 찢어서 비빈 다음 땅에 묻었다. 필자가 생각해낸 것은 아니고 몇몇 지도자들이 하는 것을 따라 했다. 지저분하지 않고 흔적도 남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 '완전분해'라고 불렀다. 요즈음 환경운동계에서 '생분해(Bio-degradable)'라 부르는 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자연 속에서는 동물들도 자신의 흔적을 조심스레 남긴다. 숲속에서 발견되는 동물들의 발자국을 보면 꼭 디뎌야 할 자리에만 자국이 있다. 그나마도 조금 가다가 흔적이 없어져 버린다. 배설물도 자신의 영토를 표시한다거나 짝을 유혹하는 등, 필요를 위해 사용된 후 시간이 지나면 자연의 한 부분으로 흡수된다. 죽음을 맞을 때도 그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혼자 조용히 죽는다. 다른 동물들에게 잡아먹힌다 해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기란 참으로 어렵다. 사람이 떠난 뒷자리에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아름답거나 좋은 흔적을 남길 수도 있고 지저분하고 더러운 흔적, 나쁜 흔적을 남길 수도 있다.

 

대학 시절, 선배가 자기에게 나온 장학금을 후배에게 양보한 적이 있었다. 형 집에 얹혀사는 처지였지만 자기보다 더 어려운 형편의 후배에게 양보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장학금을 받았던 후배도 본인이 자격이 돼서 받는 줄 알았다. 몇 년 뒤에 장학 업무를 담당하던 교직원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첫 직장이었던 학교에서도 교사 한 분이 사직한 후에 그가 재직 중 자기 봉급의 일부를 쪼개어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해 납부했던 일이 알려져 가슴을 훈훈하게 했던 일이 있다.

 

선행을 하거나 미담을 남기지 않았더라도 떠난 뒤에 기억할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의 언행이나 모습이 닮고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격조 있어서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에너지가 긍정적이고 힘차서 생각만 해도 두고두고 기운이 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구체적인 이야기 없이 그런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경우는 사람 그 자체가 아름다운 흔적이다.

 

좋은 흔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연을 맺고 살던 사람들이 자리를 떠날 때 매듭을 깨끗이 짓지 못하고 어수선한 파편을 남기고 떠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사람과의 관계일 경우 상쾌하지 못한 흔적은 상처를 남긴다.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혹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오랜 세월 고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직장을 떠난 사람의 흔적 가운데 가장 고약한 것은 금전관련 문제가 드러날 때이다. 수금한 돈을 회사에 입금하지 않고 본인이 사적으로 유용하는 사람도 있고, 이중계약을 해 회사에 손실을 끼치는 이도 있다. 개인적으로 가까운 업체에 물품을 싼값에 공급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가장 우리를 씁쓸하게 하는 것은 일을 하면서 친해진 거래처 사람들과 결탁하여 동일업종 회사를 차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이다. 이런 흔적이 드러나면 남아있는 사람들은 속이 많이 상할 뿐더러 수습하기도 힘들다.

 

벌써 9월의 마지막 주이다. 석 달만 지나면 2021년 새해가 시작된다. 자신이 살아 온 자취마다 좋은 흔적을 남겼는지 되짚어 보고 싶은 때이다. 올해는 여러 가지 연유로 그 어느 해보다도 풍파가 많았다. 그동안 어떤 흔적을 남겨 왔을까 생각해 본다.

 

가족이나 친구들, 이웃에게 향기 나는 흔적을 남겼을까, 아니면 악취를 풍겼을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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