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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소확행
10/26/20  

어려서 큰댁에서 식사를 할 때 여자들은 남자들과 다른 상에서 먹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이상스럽게 여겼다. 큰어머니만 큰아버지 옆에서 함께 식사를 할 뿐 모든 여자들은 따로 먹었고, 사촌형수 두 분은 아예 방안에 들어오지도 않고 부엌에서 따로 식사했다. 식사 도중 내가 물을 마시고 싶어 하면 큰어머니가 부엌으로 난 작은 문을 열어 형수들에게 물을 갖고 오라 시키거나 사촌 누나에게 물을 떠다 주라고 시켰다. 그만큼 그 시절의 부엌 문턱(?)은 높았다. 모든 부엌일은 여자들의 독차지였다. 남자들이 상관할 영역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지난 요즈음은 어떠한가. 주중에 직장에서 일하고 밤늦게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던 사위는 주말 내내 각종 요리를 해대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런데도 힘들어 하거나 고달파하지 않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한식, 양식을 구별하지 않고 이것저것 만들었다. 얼마 전 시청한 어떤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시어머니들은 이구동성으로 며느리 대신 자기 아들이 요리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우리 딸 시부모님은 신식이라 그런지 당신 아들이 요리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함께 즐겼다.

 

한 달 가까이 딸집에 머물다 보니 나도 뭔가 요리를 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김치찌개였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요리가 아닌가 싶다. 김치 넣고 끓이기만 하면 훌륭한 요리가 되니 말이다. 거기다 참치를 넣거나 돼지고기를 한 줌 넣어주면 또 맛이 달라진다. 그동안 경험에 의하면 김치찌개의 맛을 가장 빛내주는 것은 돼지갈비를 넣을 때였다. 돼지갈비를 사다가 깨끗이 씻고 다듬어 1회 끓일 양만큼 비닐팩에 넣어 냉동고에 보관하고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한다.

 

음식을 만드는 일에 자신감이 생기다 보니 이것저것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콩나물을 다듬고 육수를 내고 파·마늘을 썰어 넣어 콩나물국을 끓이고 계속해서 된장찌개, 뭇국, 미역국 등 다양한 국물 요리에 도전했다. 도전은 닭볶음, 각종 볶음밥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볶음밥에 올릴 달걀 프라이 만드는 것도 서툴러 노른자가 터지기 일쑤였지만 요즈음은 실수하지 않고 모양을 제대로 내서 볶음밥 위에 얹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식구들이 맛있게 먹으면 좋으련만 마지못해 먹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어떤 음식의 경우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열심히 해놓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것을 볼 때 어떤 심정인지 요리를 해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왜 그럴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까닭을 알았다. 음식을 할 때 간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 내 지론이 요리를 할 때는 소금이나 간장을 넣지 않고 ‘식사할 때 김치나 다른 반찬을 곁들여 먹으면 간이 맞는다’였다. 그러나 간이 맞지 않으니 맛이 없고 맛이 없으니 손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음식을, 요리한 내가 며칠 동안 계속 먹거나 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소금이나 국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단맛을 낼 때는 설탕 대신 요리에 감칠맛을 더해준다는 매실청을 넣었다. 그랬더니 식구들이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맛있다는 말을 가끔 하기 시작했다. 신이 났다. 당연히 더 많은 음식들이 내 손을 통해 탄생했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재료들을 손질하고 다듬고 양념을 해야 하고 일정한 시간 익혀야 한다. 그리고 식사가 끝난 뒤에는 설거지를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이 다 번거롭고 귀찮다고 생각하면 하기 싫어진다. 세상에 설거지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처음엔 설거지 하는 일이 싫었다. 그런데 자꾸 하다 보니 요령도 생기고 나름 재미도 있었다. 우선 식기에 남은 음식물 찌꺼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표면에 묻어 있는 양념이나 음식 찌꺼기는 페이퍼 타월로 닦은 후 식기들을 개수대에 넣는다. 큰 접시나 식기를 맨 아래 두고 그 위에서 컵이나 밥공기 등의 작은 그릇을 올려 먼저 닦는다. 그리고 수저나 국자, 주걱 등을 닦고 맨 나중에 남아 있던 큰 그릇을 닦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요리하기 위해 사용했던 프라이팬이나 냄비 등도 닦아야 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닦은 식기나 수저 등의 물기를 완전히 제거한 후 제자리 두어야 마침내 요리로 시작된 일은 끝이 난다. 물론 식탁도 깨끗이 닦아 놓아야 한다.

 

요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일상이 부질없다고 느끼던 때였다. 무얼 해도 만족치 못했고, 코로나19로 사회 분위기도 한없이 움츠려들어 가던 때 주방일은 뜻밖에 내게 삶의 또 하나 재미를 발견하게 해 주었고,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식구들의 모습에서 내일의 요리를 또 기다려보는 희망을 찾았고, 설거지한 식기들을 제자리에 두면서 하루를 마감한다는 정리정돈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앞으로 힘자라는 데까지 더 맛있는 음식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계속 주방일도 즐길 생각이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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