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나무야
11/02/20  

오늘도 집을 나선다. 귀찮은 마음을 이겨내고 겨우 집밖으로 나왔지만 기온이 확 낮아져서 어깨가 자꾸만 움츠려 든다. 이제 제법 패딩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몇 주 후면 장갑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빠른 발걸음만큼 빠르게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얇은 재킷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집에서 나와 동네 가게들을 지나고 큰길을 건너면 길게 뻗은 은행나무 길이 나온다. 아래위로 샛노란 길을 걷다 보면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진다. 그렇게 혼자 뿌듯해하다가 우측으로 길을 건너면 왕벚나무 길이 시작된다. 당연히 벚꽃은 없다. 벚꽃도 없는데 뭐 볼 게 있겠냐고도 하겠지만 꽃은 없지만 여전히 나무는 있다. 벚나무의 절정이 봄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지만 가을의 벚나무는 붉은 단풍으로 또다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준다. 그래서 매년 우리 동네 왕벚나무가 물들기 시작하면 ‘아...... 이제 가을이구나’ 싶다.

 

왕벚나무는 벚나무 종류 중에서 꽃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 진분홍색의 봉오리를 맺을 때부터 곱디곱다가 활짝 만개했을 때는 고상하고 기품이 있다. 왕벚나무 가로수 길을 걸으면 연분홍색 꽃으로 뒤덮인 눈부신 수관에 그만 압도당하고 만다. 그렇게 봄에는 설렘과 흥분을 안겨주며 마음을 홀딱 가져가 버린다. 꽃이 활짝 핀 후에는 바람에 날리며 눈처럼 휘날리는 꽃잎이 너무도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꽃을 잃었지만 무더위와 여름 장마를 지낸 왕벚나무는 싱그러움이 극대화되고 초록 잎사귀들은 마음의 여유와 안정감을 안겨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평온해져서 왕벚나무 그늘 밑에 오래오래 앉아 쉬고 싶어 진다.

 

가을을 맞이하고 나무 중 가장 먼저 잎이 떨어져 겨울을 준비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대견하고 장한가. 다른 나무들은 아직 울긋불긋 화려한 가을 잎을 뽐내기 바쁜데 혼자서 하늘에 가지를 내준 모습마저 아름답다. 앙상한 나뭇가지는 지난 계절들을 버텨내고 추위와 맞서 싸울 준비를 마친 생존자이자 수호자처럼 숭고하다.

 

자연에서 나무가 제 생명을 유지하며 계절을 살아가는 모습에는 천리(天理)가 담겨있다. 계절에 맞춰 순응하고 변화하는 모습은 인간이 평생을 따라 해도 반에 반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자연은 제가 할 일을 인간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 의연하게 변화를 받아들이고 욕심내지 않는다.

 

나는 열심히 걸어 한 나무 앞에 멈춰 섰다. 그 누구도 이 계절에 벚나무를 찾지 않지만 나는 요즘 매일 이 나무를 찾아오고 있다. 이 나무 덕분에 매일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만끽하고 일석이조로 만보 걷기에도 성공하고 있다. 나무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나뭇가지를 어루만지며 인사한다. "오늘도 안녕?"

 

삼 개월 전 하늘로 먼저 떠난 열세 살 아들의 이름으로 우리 동네 둘레길에 헌수 한 나무이다. 왕벚나무의 수명이 60년에서 80년쯤 된다고 하니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아들 대신 세상에 남아 풍파를 버텨내고 계절에 순응하며 살아줄 녀석이다. 우리 가족이 자주 찾던 공원, 아들이 다니던 중학교 바로 맞은편, 볕이 잘 드는 산책로에 자리한 이 나무에 새싹이 움트고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꽃을 피우길 기다린다. 그렇게 나무를 보며 감격하고 슬퍼하고 또 기뻐하다 보면 나 같은 사람도 계절과 세월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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