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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하는 날
11/09/20  

나는 미용실 유목민이다. 고정적으로 찾는 단골 미용실 없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나 같은 사람을 미용실 유목민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집 근처에 내 마음에 드는 가성비 괜찮은 미용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고 또 바라지만 아직도 정착을 못하고 있다. 새로운 미용실에 갈 때마다 부디 웃으며 나오기를 기도하지만 원판 불변의 원칙 탓인지 늘 뭔가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평생 마음에 드는 헤어 디자이너는 딱 한 명 기억나는데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미국에 살고 있을 때 잠시 고국을 방문했고 그때 소개받아 멀리까지 찾아갔었다. 그때 나는 셋째를 임신 중이었는데 전에 했던 펌이 거의 풀려버려 너무 지저분한 상태였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다시 펌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임신 중이니 펌보다는 헤어컷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나는 헤어컷만으로 과연 이 총체적 난국의 머리를 해결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간단히 가위질 몇 번 쓱쓱하고 나니 완성 전인데도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벌써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머리는 머리 손질에 재능이 없는 똥손인 내게 딱이었다. 따로 머리 손질할 것도 없고 그저 머리 감고 엎드려서 머리를 말려주면 된다고 디자이너가 그랬는데 정말 그랬다. 훌륭한 헤어컷 덕분에 거의 1년간 별로 손댈 필요 없이 편안히 머리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당시 헤어컷을 하고 지불한 비용이 요즘 우리 시어머니의 동네 미용실 파마 비용과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찌 보면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머리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돈이 아까운 줄도 몰랐다.

 

그때 이후로 다시는 그런 스타일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찍은 사진까지 내밀며 비슷하게 해 줄 것을 요청도 해보았지만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미국과 한국에서 미용실을 닥치는 대로 옮겨 다녔다. 가성비 좋은 곳도 있었고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싼 곳도 있었다. 수십 명의 스탭을 거느린 대형 미용실도 있었고 혼자서 운영하는 1인 헤어숍도 있었다. 망했다 싶을 정도로 끔찍했던 머리도 있었고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까울 정도로 마음에 드는 머리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이튿날 머리를 감고 나면 단 한 번도 디자이너가 해준 스타일대로 그날의 머리를 똑같이 재현해내지는 못했다.

 

오늘 오랜만에 미용실에 다녀왔다. 머리하기 좋은 햇살도 따스한 가을날이었다. 분명 지난여름 언젠가 미용실에 다녀온 것 같은데 머리가 점점 산발이 되어가고 있었다. 남편도 미용실 갈 때가 되지 않았냐고 자꾸 물어보는 걸 보니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것 같았다. 몇 개월 단위로 머리가 부스스해지면 어쩔 수 없이 참다 참다 미용실을 찾게 되어있다.

 

오늘 찾아간 곳도 첫 방문이었다. 적립금도 남아있는 최근에 다녀온 미용실을 뒤로한 채 새로운 곳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곳은 원장이 직원 한 명으로 두고 운영하는 크지 않은 아파트 상가 내에 미용실이었다. 내가 앉아있는 두 시간 반 동안 꼬마 손님과 중년 남자 손님이 다녀갔을 뿐 조용했다. 원장은 말수가 그리 많은 사람 같지는 않은데 내 머리에 파마약을 바르고 로드를 마는 내내 우리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코로나 이야기로 시작해서 미용실은 추석 후 11월이 제일 한가하다는 이야기, 머리 손질에 관한 이야기, 그러다가 자녀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너무 이야기가 길어지고 깊어질 것 같아서 적당한 선에서 말을 줄였더니 자연스레 대화가 끝이 났다.

 

고작 머리를 자르고 디지털펌을 했을 뿐인데 무려 4시간이 다 되어 끝이 났고 이번에도 생각했던 머리 스타일과는 많이 달랐다. 그래도 오랜만에 머리를 해서 기분전환이 된 것일까 왠지 기분이 한결 홀가분해져서 마스크 안으로 살며시 미소 지으며 방금 한 머리를 휘날리며 걸어 나왔다. 집에 오니 남편은 나의 새로운 머리 스타일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고 아이들은 왜 아줌마같이 파마를 했냐고 난리였다. 아줌마가 아줌마 파마했는데 뭐가 문제인가 싶으면서도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족들의 평은 뒤로하고 새로운 미용실을 찾아 떠도는 유목민 신세를 면할 수 있을지는 일단 내일 머리를 감아본 후 결정할 생각이다. 부디 이제는 오랜 미용실 방랑을 마치고 말이 필요 없는 단골 미용실에 정착하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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