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 외교
04/23/18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 이어 아베 일본 총리가 LA를 방문했다. 그의 일정에 맞추어 많은 한인단체들을 중심으로 과거사와 위안부 문제를 사과하라는 시위가 진행되었다. 27일 아베 총리가 연설한 하버드대 케네디 기념관 앞에서도 시위대들은 피켓을 들고 사과를 촉구했다. 실제로 아베 총리의 미국 방문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미일 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이해득실을 따지고 논의하기보다 과거사 관련 발언, 즉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에 초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물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회담 이후에 세계사의 도도한 물결이 어떻게 흘러가는가에 있다.
 
 
이번 회담에서 미일 양국은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발표했다. 새 지침에 의하면 미국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북한이나 러시아, 중국의 탄도미사일을 조기에 탐지할 수 있게 됐다. 또 집단 자위권이 행사되면, 미군 자산의 보호, 수색, 구난, 기뢰 제거, 강제 선박 검사 등의 지원을 자위대로부터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북한의 도발 억제 효과가 있으며, 동중국해의 센카쿠 열도 때문에 중국과 일본이 충돌할 가능성도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평화헌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일본 자위대가 미군과 함께 세계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이 만만치 않다. 올여름까지 마치겠다고 약속한 안보 관련 법률 개정 법안을 아직 국회에 제출조차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또 일본 내에서 진보 성향의 언론들은 일본의 국제적 군사 개입이 커질수록 일본인에 대한 테러 위험이 높아진다며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일본인들의 원초적 공포심을 지적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미일 동맹 강화는 중국의 확장을 견제하려는 계산의 산물이지만 중국의 국력은 앞으로도 계속 강화될 것’이라며‘미일중이 태평양에서 공존하는 장기 비전이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한국의 시각으로 보면 작금의 상황은 임진왜란 당시와 비슷하다.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오다 노부나가라는 희대의 군웅이 적들에 포위되어 자결했다. 이틈을 타 그의 수하에서 세력을 키워왔던 히데요시는 군소 지방 권력자들에게 명과 조선 침략이라는 프로젝트를 내세워 일본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한다. 그리하여 조선 침략을 강행하고 사색당쟁을 일삼고 있던 조선을 뒤흔들어 놓는다. 선조는 피난길에 나서고 명의 도움을 요청한다. 이순신이라는 명장이 나서서 일본의 군대를 물리치지 않았다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수 세기를 앞당겨 이뤄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과 중국의 수뇌부들이 상호방문을 통해 우호적인 관계를 연출할 때 일본은 미국에게 더욱 긴밀하게 접근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군 개념을 자위대 개념에서 방위군, 더 나아가서 타국에 자국 군대를 파견할 수 있도록 헌법까지 수정하며 바꿔버렸다. 이를 위해 미국의 협조를 얻어냈고 급기야 미상하의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합동연설을 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양했다. 서로 으르렁대던 중국과의 관계도 반둥회의에서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세상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버렸다. 일본의 각료들은 아베의 반둥회의 연설과 중·일 정상회담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보란 듯이 신사참배를 강행했다. 안으로는 국민들의 여론을 모으는데 성공했고 밖으로는 외교적으로 아시아의 맹주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했다. 주변국들을 제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실정은 어떠한가. 여당과 야당은 공무원 연금법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싸움을 계속하고 있고 양당 모두 당내 파벌싸움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 정부는 세월호에 묶여 그 어떠한 진전도 이루어 내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성완종 리스트가 터져 정치권은 거의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모두가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있을 뿐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내 정치현실에 밀려 외교는 실종이다. 미국, 일본, 중국이 서로 견제하면서도 자국의 실속을 단단히 챙기며 백년대계를 도모하고 있을 동안 대한민국의 외교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종전 후 탄생한 일본 수정주의시대 첫 총리인 아베는 미주 한인 사회, 주류 언론과 하원의원 25명의 사과 발언 요청을 묵살했다. 아울러 시위대의 거센 항의와 요구를 무시하며 미국 방문 일정을 순탄하게 진행시켰다. 그에 대한 한인들의 피맺힌 시위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오리무중인 대한민국 외교 앞에 그들의 절규는 허공에 맴도는 메아리 같다.
 
 
고국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에 살면서도 고국의 일에 발 벗고 나서는 그들을 지원하고 받쳐 줄 모국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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