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홈으로 발행인 칼럼
김장
11/23/20  

비가 한바탕 쏟아진 뒤로 아침저녁 제법 쌀쌀해졌다. 이곳에도 겨울이 찾아 온 것이다. 혹자는 남가주에 겨울이 없다고 얘기하지만 분명히 겨울이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마운틴 발디에는 흰 눈이 덮여있다. 이곳에 비가 내릴 때 고도가 높은 그곳에는 눈이 내린다. 마운틴 발디는 백두산보다 300미터 쯤 더 높은 산이다.

 

넋 놓고 눈 덮인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선생님, 내일 김치가 도착한데요. 내일 몇 시에 뵐 수 있나요.” 제자는 강원도 고랭지에서 만들었다는 김치를 주문해서 먹고 있다면서 언젠가부터 자기 것을 사면서 우리 것도 맡아서 대주고 있다. 사다 먹던 동네 마켓 김치와 큰 차이는 없으나 분명 맛이 다르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해도 막무가내다. 벌써 반년은 지나지 않았나 싶다. 김치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염치불구하고 갖다 주는 김치를 받아먹고 있다.

 

이맘때면 김장을 준비하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날씨가 추워져서 김장을 하는 건지, 김장을 할 때면 추워지는 건지 모르지만 항상 김장 때면 추웠다. 김장 하루 전 날 어머니는 무, 총각무, 대파, 쪽파, 갓, 마늘, 생강 등을 씻고 다듬었고, 늦은 저녁 배추를 반으로 갈라 소금에 절여 두었다. 그리고 김장 당일, 동네 아주머니들 몇 분이 오셔서 배추를 씻고 무채를 썰어 양념과 함께 버무려 배춧잎 사이사이에 속을 집어넣는다. 이 밖에도 총각김치, 동치미까지 겨울 양식으로 준비했다.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머니가 양념이 잘 버무려진 배춧속을 먹기 좋게 둘둘 말아 입안에 넣어주곤 하셨다. 그리고 뒷마당 한편에 땅을 파서 가마니를 두르고 큰독을 묻은 후 김치를 넣고 뚜껑을 헌옷 등으로 감싸고 또 그 위를 가마니로 덮었다.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땅 파는 일은 내 몫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시키곤 했다.

 

이날 어머니는 배춧국을 끓였다. 우리 4남매는 이웃집 아주머니들과 둘러 앉아 구수한 된장을 풀은 배추국 한 대접에 밥을 말아 갓 만들어진 배춧속과 함께 먹었다. 한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그렇게 담근 김치를 겨우내 먹었다. 김장김치 없는 겨울은 생각할 수 없었다. 특히 서민들에게 김장김치는 별다른 반찬이 없고 야채 구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 봄이 올 때까지 겨우내 매우 중요한 양식이었다.

 

이처럼 김장은 겨울이 긴 우리나라의 풍습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은, 이웃과 품앗이를 하며 정을 나누는 아름다운 행사였으며 겨울을 나기 위해 꼭 필요한 절차였다.

 

미국살이를 시작해서는 산호세에 사시는 장모님이 일 년에 서너 번 오실 때마다 배춧속 넣은 김장 김치를 좋아하는 사위를 위해 김치를 담가 주고 가셨다. 오실 때마다 공항에서 마켓으로 직행해 김칫거리부터 사갖고 와서 하루 종일 김치를 담그셨다. 김치가 떨어질 때쯤이면 또 내려오셔서 담가주곤 했다. 개성이 고향인 장모님이 담근 김치는 서울 태생인 어머니의 김치와 맛에 있어서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김장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무를 소금에 절여서 구동지(九冬至)에 대비한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때에도 김장을 담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담그는 김장법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고추가 한반도에서 재배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에 고추가 들어온 것은 1600년경이라고 하니 한국의 전통 발효음식인 김치에 고춧가루가 가미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맛을 내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이후의 일이라는 얘기다.

 

비가 내리고 열흘쯤 지난 요즈음 마운틴 발디는 눈이 녹은 듯 보인다. 그러나 산길에는 녹지 않은 눈이 덮여 있을 것이다. 제자가 가져다 준 김치를 먹으며 김장에 대해 생각한다.

 

김장은 한 해를 마감하는 마무리요 닥쳐올 날들에 대비하는 준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한 해, 한 해 마무리 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할 준비가 필요하다. 즉 인생살이의 김장을 담가야 한다는 말이다. 11월 하순, 이제 곧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나면 12월이다. 올해는 무엇으로 어떻게 인생의 김장을 담글 것인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때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려 난리 난리 생난리를 치고 있다. 다시 또 통행금지가 시작되고 많은 제약이 따르는 생활이 펼쳐지고 있다. 가능한 한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 이외의 사람들과 접촉을 피해야 한다고 하니 조용히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내년을 계획하는 슬기로운 인생의 김장을 담그면 어떨까 싶다.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를 멀리하고 조용히 나를 다듬고 양념을 넣고 비벼서 내년을 위한 인생의 김장을 담가보자. 제자가 갖다 준 맛있게 잘 익은 고랭지 배추김치를 먹으면서 2021년을 위한 인생의 김장을 담그고 있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