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몇째입니까?
11/30/20  

아이 넷을 키우다 보면 매일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이다. 같은 부모의 자식이지만 아이 넷이 어쩌면 그렇게 제각각인지 타고난 성향, 성별, 성격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지만 아이의 위치(아마도 태어난 순서?)에 따라서도 꽤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눈치는 없지만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첫째, 적당히 요령을 피우지만 기본적으로 할일은 챙기는 둘째,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제 편한 대로 하는 셋째, 살살 웃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넷째......

 

지난 몇 년간 나는 큰 아들의 문제집을 채점한 기억이 없다. 문제집 뒤에 정답지를 아예 분리하지도 않고 아이 스스로 채점을 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해보니 참 편했다. 채점한 문제집을 내게 가져오면 확인 후 틀린 문제를 한번 더 점검하라고 아이를 방으로 돌려보내면 그뿐이었다. 너무 많이 틀렸거나 쉬운 문제도 틀리면 아쉬운 마음에 한마디 했고 그러면 아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둘째와 셋째에게도 첫째에게 했던 방법 그대로 적용했다. 그런데 둘째가 3학년이 되고 얼마 안 가 수학 문제집 단원평가에서 백점을 맞은 적이 있었다. 문제를 훑어보니 오답이 나올 만도 한데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는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그 어디에도 수학 문제를 푼 흔적조차 없었다. 합리적인 의심을 토대로 나는 아이를 불러 제일 어려운 문제를 콕 찍어 다시 한번 풀어보라고 했다. 예상대로 아이는 문제를 풀지 못했다. 나는 정답지를 회수했고 그 후로 나에게는 피곤한 일과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사실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거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둘째였던 나도 둘째 나이 때쯤 학습지에 대충 정답을 베껴 쓰고 적당히 문제에 밑줄을 그으며 푼 흔적을 남기지 않았던가? 엄마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몇 문제 적당히 틀려주고 중간중간 풀이 과정을 넣어주는 세밀함까지 있었으니 그에 비하면 그대로 정답을 옮겨 적은 둘째의 순수함에 안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는 어릴 때 꽤나 별나고 유난스러웠던 오빠가 부모님께 혼나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덜 혼나는 방법을 습득하게 되었다. 

 

우리 집 셋째의 방식은 조금 달랐다. 아예 문제집이 사라졌다고 잡아떼는 방법으로 꽤나 참신했다. 처음에는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런가 보다 했다. 본인의 물건을 잘 간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만 한두 마디 나무랐던 것 같다. 그러나 주일에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 열어본 종이 분리수거 봉지에서 셋째의 학습지 뭉치를 발견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셋째는 그 이후에도 두 차례쯤 더 같은 방법을 시도하였으나 그럴 거면 앞으로 학습지고 뭐고 다 때려치우라고 호되게 혼이 난 이후로 현재까지 잠잠하다. -아이들은 왜 하기 싫어하면서 막상 그만두라고 하면 싫다고 하는가?-

 

이렇게 문제집 하나 푸는 것을 갖고도 서로 다른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내 머릿속도 복잡하고 마음도 오락가락한다. 본인이 싫으면서도 요령은커녕 융통성도 발휘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참고 해내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그렇게 성실해도 눈치가 없어서 제일 많이 혼나고 책임감의 무게 때문에 본인도 적지 않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사는 것이 마냥 좋지만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적당히 요령도 피우고 엄마 눈치 살피며 기분도 맞춰주는 녀석은 훨씬 덜 혼나는 것이 현실이니깐. 하지만 이 간단한 원리를 터득한다한들 내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니깐...... 

 

이제 내년이면 넷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나는 넷째에게 정답지를 맡겨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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