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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죽어도 ‘아아’
12/07/20  

따뜻한 아메리카노요."

"전 라떼요."

"저도 아메리카노. 따뜻한 걸로요."

 

"음... 저는…... 배도라지 생강차요." 

주문대 앞에 주르륵 같이 서있던 친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생강차라니!

 

나는 커피 맛을 모른다. 커피를 잘 알지 못하는 내 기준에 그나마 맛있는 커피는 시원하고 깔끔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고로 나는 일평생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는 "얼죽아"로 살아왔다.  

 

작년까지만 해도 꽃피는 봄이 오나, 무더운 여름은 물론이오, 가을에도 한파가 와도 언제나 얼죽아의 권위를 지켜왔다. 한겨울 롱패딩을 입은 채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새파래진 입술이 덜덜 떨려와도 어김없이 얼죽아를 고집해서 동행한 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 추워?"라고 말해야 자연스러웠다. 그게 나였다. 어떤 이는 내가 남들보다 열이 많아서 그런 거라 했고 또 어떤 이는 가슴 답답할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한 것이 없다고도 했다. 

 

내가 단순히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에 가는 일은 단연코 없었다. 두어 번 모닝커피를 마시는 이들을 흉내 냈다가 카페인에 취해 하루 종일 울렁울렁 마치 과음한 다음날의 숙취를 경험 이후로 더욱 확고해졌다. 내가 카페에 가는 것은 누군가와 시간과 이야기를 향유하기 위함이었고 그래서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에는 최소 주 2-3회 이상 카페를 찾기도 했었다.  커피도 즐기지 않는 내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곧 만남이었고 대화였다. 컵 안에 얼음이 다 녹아 사라질 때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사실 커피 맛을 잘 모르는 내게 4천 원짜리 아메리카노(아이스는 5백원을 추가하기도 함) 한잔은 결코 싸지 않다. 차라리 김밥이나 햄버거를 사 먹지 싶을 정도로 따지고 보면 세상 아까운 돈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페에 가면 습관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커피 맛을 몰라도 시원함이 좋았고 식사 후 마시면 입안이 정돈되는 것 같아 좋았다. 게다가 그나마 제일 저렴하고 제일 빨리 나오고 단체 주문 시 한 가지 메뉴 통일화에도 적당했다. 사실 새콤달콤한 생과일 주스나 청량한 에이드 음료가 훨씬 맛있지만 아메리카노보다 곱절은 비싸고 칼로리도 곱절 이상 높았다. 아무튼 남들 다 아메리카노 마시는 분위기인데 혼자 색다른 것을 주문하면 남들 다 짜장, 짬뽕 먹는데 혼자 팔보채 밥이나 삼선짜장을 주문하는 기분이랄까......  결국 한마디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가장 만만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얼죽아 인생에 치명타가 날아들었다. 작년 가을부터 지독한 비염에 시달렸고 이따금씩 기침이 발작처럼 터져 나오면 통제가 불가능했다. 정확한 원인을 모르지만 추측하건대 기관지가 차가워지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김없이 기침이 시작되었다. 코로나 시대에 공공장소에서의 기침은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없었고 마치 테러라도 저지른 대역죄인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임산부 비타민 한번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았던 내가 비염약만큼은 늘 품에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뿐 아니라 그 좋아하던 더운 날 꿀꺽꿀꺽 마셔야 제맛인 생맥주를 급기야 천천히 식혀(?) 먹는 사태까지 오고 말았다. 지금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더 이상 비염약을 품고 다니는 일은 없어졌지만 아이스가 잔뜩 담긴 음료를 손에 쥐면 이상하게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진다. 

 

코로나로 인해 카페 출입도 자유롭지 않은 요즘이다. 아이들 등교시키고 카페에 모여 아침부터 목이 탄다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던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차 한잔 마실 기회가 생기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따뜻한 허브차나 레몬차, 생강차 등을 즐겨 마시게 되었다. 중년의 벽을 넘지 못한 것 같아 조금 분하기도 하지만 뜨거운 차가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느낌이 싫진 않다.  물론 앞으로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이제 공식적으로 얼죽아 클럽은 탈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따뜻한 생강차를 주문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호들갑 떨지는 않을 것이다(이런 글 자체가 이미 호들갑이려나?). 

 

얼어 죽을라고 환장했냐는 소리를 들어가며 한겨울 미니스커트에 브이넥 블라우스를 입고 손 시린 줄도 모르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너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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