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막내가 학교에
03/01/21  

나의 넷째, 사남매 집 막둥이가 드디어 학교에 간다. 평생 아기로 머물 것만 같던 우리 집 귀염둥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니 나이 든 엄마는 괜히 감정이 격해진다. 막내가 출산 직전 배 속에서 몸을 거꾸로 돌리는 바람에 응급 수술로 세상에 태어나 만 세 살 직전에 기저귀를 졸업하고 "me want agua 빨리"와 같이 한국어, 영어, 스패니쉬 (보모가 멕시칸) 3개 국어를 오묘하게 섞어 말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이제는 형과 누나가 놀리면 마냥 당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지킬 줄 알며 얼마 전부터는 혼자 화장실 뒤처리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얼마나 능숙한지는 확인 불가) 자기가 글을 못 읽어 선생님이 혼을 내면 어떡하냐며 걱정도 하는 어린이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내  입학식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훨씬 전의 일들도 드문드문 기억을 하는데 입학식은 아무리 곰곰이 떠올려도 아무 기억이 없다. 과천 청계국민학교를 입학해서 한 학기 다니다가 서울로 전학을 갔기 때문인지 오빠 입학식 사진은 존재하건만 내 입학식 사진은 한 장도 없기 때문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꾸역꾸역 억지로 떠올려보는 가슴팍 가재 수건 명찰과 운동장에 반별로 줄을 섰던 풍경은 티브이에서 본 입학식 장면인지 내 경험의 기억인지 분간할 수 없다. 아무런 기억이 없지만 학교라는 웅장하고 낯선 곳에 들어서며 느꼈던 중압감만은 아련히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입학은 제대로 된 사회생활의 첫 시작이니만큼 아이뿐 아니라 엄마도 걱정이 앞선다. 물론 유치원에 다니긴 했지만 아기자기 다정다감한 누나같이 예쁜 선생님이 급식도 가져다주고 화장실 뒤처리도 도와주고 수시로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던 환경과는 천지 차이이니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하다. 화장실이나 제대로 갈까, 아직 한글도 다 떼지 못했는데 선생님 눈총을 사면 어쩌나, 친구들 사이에서 모난 행동을 해서 왕따라도 당하면 어쩌지 등등 엄마 특유의 노파심을 최대한 끌어모아 갖은 걱정을 다해 본다. 모든 게 부질없고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면서도 그냥 지나치기 섭섭해서인지 엄마의 숙명 같은 것인지 또 그렇게 나의 전긍은 시작된다. 

 

모든 부모들이 기본적으로는 "튼튼하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고 생각하지만 마음 한편에 내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은 물론 운동도 적당히 하고 교우 관계도 좋고 선생님께 사랑도 받는 학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 셋을 먼저 학교에 보내며 점점 깨닫게 되는 것은 자녀는 부모가 계획하고 의도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보니 공부나 일은 원래 하던 것보다 시간을 투자하고 몰두하면 바로 성과를 볼 수 있었고 연애도 진심만 통하면 그럭저럭 내가 원하는 대로 풀려갔는데 자식만큼은 뭘 해도 내 마음과 같지 않았다. 아무리 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육아 관련 서적을 섭렵하고 괜찮은 부모 노릇을 하려고 몸부림을 쳐봐도 나는 아이 마음 하나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한낱 답답한 엄마에 지나지 않았다. 

 

옆에서 부모가 조바심을 내고 닦달할수록 나만 괴롭고 아이는 저만치 멀어져 간다.  때로는 아무리 애가 타고 안타까워도 부모가 억지로 무엇을 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자기 자식을 이모가 조카 바라보듯, 아줌마가 옆집 아이 바라보듯 키우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정말 부모가 그저 아이를 믿어주고 곁에서 지켜봐 주는 것이 전부일 때도 있다. 지금도 나는 입학하는 막내를 위해 책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챙겨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도할 뿐이다.  

 

"막내는 사랑, 꽃보다 막내!  너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해! 궂은 날씨, 모진 풍랑을 엄마가 대신 맞아줄 수는 없지만 함께 맞아줄 수는 있으니 아무것도 겁내지 말고 부딪혀보렴. 하라! 그러면 힘이 생길 것이다!" 

이는 어쩌면 새롭게 도약하는 만 여섯 살 아들뿐 아니라 막내를 입학시키는 나이 지긋한 애넷 맘 나 자신에게 거는 마법의 주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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