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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look beautiful
03/08/21  

벌써 삼월이다. 시간이 이렇게 쏜살같이 지나갈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2021년이 어느새 1/4분기의 마지막 달에 접어들었다. 별로 해 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힘이 빠진다. 거기다가 1년 전에 시작된 코로나19로 너나 할 것 없이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있지 않은가.

 

퇴근길에 잠시 월마트에 들렀다. 필요한 물건을 골라서 계산대 앞에 줄을 섰다. 퇴근 무렵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계산대마다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기다리면서 무심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었다. 다들 지친 모습이었다. 줄 서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고달파보였다. 하루 종일 흘린 땀이 그대로 배어 있는 옷을 입고 그 속에 끼어 서 있는 필자의 모습도 그다지 나을 바가 없었을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쳐다보다가 문득 필자 바로 앞에 서 있는 중년 아줌마를 지켜보게 되었다. 커다란 키에 몸집이 꽤 있는 전형적인 미국 아줌마이다. 청바지 차림이기는 했으나 검은 가방을 메고 구두를 신은 옷차림이 하루 종일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집에 가기 전에 생필품을 몇 가지 사러 잠시 들린 것 같았다.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 하나로 묶었다. 그 머리를 한쪽으로 갸우뚱하고 다리 한쪽으로 몸무게를 실은 채 비스듬히 서 있다. 은퇴할 나이는 아직 아닌 것 같으나 그렇다고 한창 젊은 나이도 아니다. 마스크 옆으로 보이는 얼굴과 커다란 눈에 피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시선은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허공에 고정되어 마치 몸만 계산대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공허한 모습이었다.

 

정신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빈 껍질만 남은 것 같은 아줌마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그 사람의 고달픈 하루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게 시달리고, 생활의 무게에 짓눌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져 버린 마음이 잡힐 듯하다. 오늘 하루가 이러했는데 내일 하루도 다를 바 없으리라는 체념과 자조 섞인 모습.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그것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상태에서 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면서 그토록 지친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녀의 모습에서 한 가지 희망을 찾자면 청바지 위에 입고 있는 초록색 스웨터였다. 비싸 보이지도 않고 낡은 옷이었지만 그 청량한 초록색이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우중충한 색깔의 상의를 입고 있었다면 아주 절망적일 뻔 했다. 그 색깔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시선을 고정시키고 멍하니 있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필자를 쳐다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눈으로 내게 묻고 있었다. 왜 쳐다 보냐고.

 

그 순간 불쑥 나도 모르게 마스크를 하고 있음을 잊고 말이 흘러나왔다. “You look beautiful in that green sweater.” 말을 해 놓고 뜨끔했다. 계산대 앞에서 여자에게 수작이나 거는 한심한 동양 남자로 보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아줌마의 반응은 전혀 의외였다. 필자의 말을 듣는 순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면서 “Thank you so much. That just made my day.”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계산대 위에 화장지를 얹어 놓았다. 마스크 속의 입모양을 볼 수는 없었지만 눈가의 주름 짓는 것으로 보아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아줌마가 눈을 흘겼다 해도 별로 할 말이 없을 뻔했던 필자도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의 앙금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어릴 때는 온 세상이 칭찬 받을 일로 가득차 있었다. 모든 것이 칭찬받을 일 뿐이었다. 잼잼을 해도, 도리도리를 해도, 몇 마디 말을 옹알거릴 때도, 첫 걸음마를 뗄 때도 온 세상의 칭찬과 격려가 쏟아졌다. 그 무조건 잘한다는 말을 들으며 온 힘을 다해 자라난다. 자라서 한 걸음 한 걸음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서 잘한다는 말은 서서히 줄어들고 비난과 질책의 말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인간이 삶을 헤쳐 나간다는 것은 그 부정적인 말의 홍수 속을 견뎌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은 아기였을 때나 어린아이였을 적에 들었던 칭찬과 격려의 기억으로 한평생을 버텨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 칭찬이 필요하다. 더 많은 격려가 필요하다. 실수를 할 때도, 실패를 할 때도, 좌절을 할 때도 일으켜 세워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아니, 그냥 가만히 있어도 그대로 괜찮다는 인정이 필요하다. 험난하고 막막한 세상을 가로질러 갈 때 잘 한다는 말 한마디는 천군만마의 힘이 된다. 그 힘든 세상의 한 조각인 오늘 하루를 가로지르려면 무엇이라도 긍정해 주는 말 한마디가 주는 ‘옹골찬 힘’이 필요하다.

 

그 말 한마디를 가능케 하는 것이 긍정과 격려의 시선이다. 너그럽고 따뜻하게 바라 볼 때 모든 인간은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가 된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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