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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에서
03/29/21  

 

지난해 가을, 회사 앞뜰에 작은 꽃밭을 만들었다. 잔디가 자라지 않아 흙이 훤하게 드러나 있는 손바닥만한 구석 땅에 꽃모종을 사다 심었고, 집 뒤뜰에서 자라던 알로에 일곱 그루를 옮겨 맥도날드와의 경계 삼아 만든 무릎 높이의 낮은 담장 밑에 나란히 심었다.

 

꽃밭에 있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준다. 그리고 예쁜 꽃들을 즐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그렇지 않다. 어떤 꽃은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도 피어있다. 십일 만에 진다해도 피고지고를 계속하니까 일 년 열두 달 피어 있는 듯하다. 어떤 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가 얼마 후에 흙을 뚫고 나온다.

 

그렇다고 꽃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곱 그루의 알로에 하나하나를 꼼꼼히 들여다본다. 한 그루 한 그루의 생김새가 다르고 색깔도 다르다. 특히 알로에 한 가운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작은 줄기가 솟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일곱 그루 전부에서 새 줄기가 나왔고 하루하루 커가고 있다. 연두색 생명이 신비롭다. 그 작은 생명들을 하나하나 만지고 쓰다듬어 준다. 햇볕이 쨍쨍 내려 쬐는데 무슨 청승이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즐거운 일과 가운데 하나다.

 

최근에 꽃밭에서 얻은 기쁨 가운데 하나는 열무에 꽃이 핀 것이다. 지난 11월에 아버지가 편지봉투 속에 넣어서 보관해오던 씨앗을 뿌렸고 그것이 자라 꽃을 피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한 번 열무 몇 포기를 뽑아다가 김치를 담근 후에는 씨앗을 받겠다는 생각에 눈여겨보며 기다렸다. 드디어 꽃을 피웠다. 이제 씨앗이 여물면 받아 두었다가 다시 또 심고 또 씨앗을 받고 또 심을 생각이다. 이렇게 몇 차례 반복하다 보면 내 죽은 뒤에 누군가가 발견해서 또 어딘가에 심겠지.

 

이렇게 꽃밭에서 기쁨만 얻는 것은 아니다. 가끔 슬픔도 맞이한다. 처음 알로에를 옮겨 심을 때만 해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살기만을 바랐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들여다보고, 물도 주었다. 옮겨 심은 것이 뿌리를 내리고 잘 적응을 해서 참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저 물만 주었을 뿐인데 잘 자라 주었다. 서너 달 지날 무렵 가장 크고 잘 자라는 알로에 옆에 흙을 뚫고 새싹이 나왔다. 참으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그 새로 나온 싹 옆으로 다른 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새싹 옆으로 조금 떨어져서 본체 바로 밑에 또 다른 새싹이 돋아 나왔다. 세 군데에서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서 자라기 시작했으니 놀랄만한 일이 아닌가. 손바닥만한 앞뜰이 풍성해져가고 있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누군가가 무심코 밟으면 그대로 죽어버릴 텐데.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때마다 어린 새싹들이 무사히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한 달여를 보냈다. 그런데 오늘 아침(3/24)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누군가가 그 작은 싹들을 밟은 것이다. 발자국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 추측건대 누군가가 십여 초 빨리 가려고, 길로 가지 않고 화단을 넘어 가다가 싹을 보지 못하고 밟은 것이다.

 

이 화단은 손바닥만 한 잔디밭과 손바닥보다도 작은 꽃밭으로 이루어져있다. 사람들이 맥도날드에서 음식을 사갖고 와서 잔디밭에서 먹기도 하고, 맥도날드와 경계를 위해 낮게 쌓아 놓은 담장에 앉아 먹기도 한다. 다 먹은 후에는 화단에 음식물이나 포장지 등의 쓰레기들을 버리고 가기 일쑤고, 그 뒤처리는 내 몫이다. 여기까지는 얼마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는 식물들의 몸뚱이가 잘려나가고 밟힌 것을 보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내 손가락이 베인 것보다 더 쓰라린 아픔이다.

 

어느 정도의 부상인가 세세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셋 중에 본체에 거의 붙어서 가장 최근에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밟히지 않았다. 두 싹이 밟혔는데 아주 무참히 짓밟히지는 않아 일부 소생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군가가 또 밟는다면 그대로 죽어버릴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다친 작은 싹들 주위에 빙 둘러서 나무젓가락을 꽂았다. 젓가락 울타리가 여린 생명들을 보호해 줄 거라고 확신할 순 없어도, 화단을 가로질러 가려는 사람들에게 그곳에 생명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줄 수는 있지 않을까?

 

소리치지 못 하는 연약한 생명이라고 짓밟아서는 안 된다. 밟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원래 이곳에 없었던, 옮겨 심은 생명이라고 해서 주인이 될 수 없다며 의도적으로 짓밟는 것은 범죄 행위와 다름없다.

 

최근 미국에서 아시안 혐오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삶의 터전을 옮겨 살고 있는 이민자에게 짓밟힌 알로에가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이란 뜰은 이민자로 말미암아 더 아름답고 풍성해질 수 있었다. 이민자라고, 소수계라고 소리 내지 않고 움츠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우리 주위에 나무젓가락 울타리를 쳐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우리도 이 뜰의 주인이라고, 이 뜰을 더욱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드는 존재라고 스스로 소리쳐야 한다. 그 소리가 씨앗이 돼 땅에 떨어져 꽃을 피우면 또 누군가 그 씨앗을 심어 더 많은 꽃을 피우게 되고 소리는 점차 더 큰 울림이 될 것이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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