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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려운 책 정리
03/29/21  

 

얼마 전 아이들 방 가구를 옮기면서 책장을 살짝 정리해주었다. 첫째가 태어난 이후로 지난 십여 년 동안 모아놓은 아이들 책이 너무 많았다. 안 읽는 책들을 비워내는 작업이 시급했다. 방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빈틈없이 꽉꽉 채워진 책장에 책들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지 의문스러웠다. 정작 꽂아두어야 하는 책들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책장 밖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이 좋은 책들을 왜 읽지 않는지 괘씸해 하며 책장에서 책을 끄집어냈다. 

 

내게는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는 것이 몹시 설레던 때가 있었다. 돈이 생기면 읽고 싶은 책을 망설임 없이 사는 것이야말로 요즘 말로 제대로 플렉스 하는 기분이었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었다. 그러다가 아이가 생기고는 내 마음대로 아이를 위한 책을 사들였다. 남들이 목돈 주고 사는 전집은 아예 거들떠도 안 보고 성심성의껏 단행본으로 한 권씩 한 권씩 사 모았다. 아이들도 나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과학도서는 안 읽어도 동화책은 좋아하겠지, 위인전은 안 읽어도 모험이나 추리 소설은 좋아하겠지, 역사책은 안 읽어도 만화인 먼 나라 이웃나라는 좋아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내가 사서 모은 책들을 기대만큼 좋아해 주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 공부는 싫어했어도 책은 좋아했다. 시험 점수는 별로였어도 독후감 상은 여러 개 받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나면 반드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비슷한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좋아하는 책은 읽고 또 읽었다. 나의 책 욕심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 같다. 아버지의 책장에는 빛바랜 책부터 신간 서적까지 꽉꽉 채워져 있었으니깐. 나는 아버지의 책장을 흠모했고 그 책들을 꺼내 읽을 때마다 마치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뿌듯해지곤 했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 방향으로 쓰인 옛날 책을 읽었을 때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까지 했었다. 

 

어느덧 나도 중년이 되었고 언제부턴가 제한적인 공간에 물건이 넘쳐나는데 엄청난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책도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쉽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읽고 싶은 책, 읽어야만 하는 책, 선물 받은 책, 충동구매 한 책…... 책이 쌓여가고 그 중에는 안 읽은 책도 함께 쌓여갔다.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는 책, 몇 번 도전했지만 끝내지 못한 책들이 늘 마음에 숙제처럼 남아있다. 지금까지 안 읽었다면 앞으로도 안 읽을 가능성이 다분한데 안 읽고 팔아버리자니 책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나는 워낙 물건을 잘 못 버리는 사람이긴 하나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책이다. 음식은 유통기한이 있으니 폐기가 손쉽고 옷이나 신발은 유행도 무시할 수 없지만 작아지거나 닳거나 해서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책은 엊그제 읽고 꽂아둔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한 번도 책을 버리거나 팔아본 적이 없다. 아마도 교과서를 버린 것이 (그것도 눈물을 머금고) 유일할 것이다. 심지어 초등학교 때 즐겨 읽던 책들도 책장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사실 너무 오래되고 훼손까지 되어서 중고서적으로서의 가치조차 없는 책들이 태반이지만 나에게는 이런저런 추억과 의미가 있다 보니 함부로 다룰 수가 없다. 이 많은 책들을 다시 펼쳐볼 찬스는 얼마나 될까? 정리하는 게 옳은 선택일 텐데 뭐가 그리 아쉽고 어려울까? 

 

선뜻 책 정리를 못하는 내게 남편은 전자책을 추천해주었고 유료 회원으로 가입하기 전 한 달간 무료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만 있으면 책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대단히 편리하긴 했다. 외출할 때 가방에 무거운 책을 넣어 갖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읽다가 멈춰도 다시 시작할 때 내가 읽던 자리를 찾아가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매달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원하는 책들을 원하는 만큼 읽을 수 있었다. 달콤한 유혹이었지만 회원 가입을 하진 않았다. 아직은 종이책을 포기할 순 없을 것 같다. 여전히 책장 넘기는 소리가 좋고 아날로그가 주는 편안함이 좋다. 읽고 싶던 책의 첫 장을 펼칠 때의 그 흥분과 설렘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다. 내 책장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마음을 다잡지 못해 당장 정리는 어려울 것 같다. 올봄에는 책 정리 대신 옷 정리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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