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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든 엄마
04/05/21  

나는 연애할 때 내 핸드백을 남자 친구에게 맡기지 않는 타입이었다. 여자 화장실 앞에 누가 봐도 티 나는 여성용 핸드백을 메고 멋쩍은 표정으로 여자 화장실에서 누가 나올 때마다 고개를 드는 남자들을 보고 있으면 괜히 민망함이 밀려왔다. 잠시 손이 부족해서 가방을 들어주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마치 그것이 남자 친구의 의무라도 되는 양 데이트 내내 여자 친구 핸드백을 대신 들어주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의아하다. 물론 미국에서도 종종 목격되는 광경이긴 하나 대체적으로 여자의 가방이 크거나 무거울 경우 남자가 대신 들어주는 것인데 한국은 조금 다르다. 여성의 미니백이나 크로스백도 대신 들어주는 남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보니 아 이건 뭐 데이트 문화인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는 동네에서 아이 책가방, 학원 가방을 주렁주렁 대신 메고 다니는 엄마들을 숱하게 보게 되었다(미국은 차로 이동해서 잘 못 봄). 가끔 엄마보다도 어깨가 넓어진 고학년 남자 아이의 가방까지 대신 메주는 엄마를 보면 솔직히 뭐 저렇게까지 하나 싶기도 했었다. 그리고 나는 아이 가방 대신 들어주는 여느 엄마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아이도 저마다 자기 가방 하나쯤 멜 수 있는 힘이 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 유치원생, 초등학생,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가방 크기와 무게가 다르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우리 아이들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체구가 작고 말랐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스스로 가방을 메고 다녔다. 특히 셋째는 유난히 체구가 작아서 동네에서 만나는 어르신들마다 "어머 그 큰 가방 메고 다니는 막내(막내 아니고 셋째임) 너무 귀여워요. 근데 걔는 왜 그렇게 가방이 커요?" 했지만 뭐 그런가 보다 했다. 교과서 배부 날은 엄마들이 교문 앞에서 가방을 받아주기도 하고 방과 후 바로 학원 가는 아이들을 위해 학원 가방을 들고 마중 나가는 엄마들도 많았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 줄 알았다. 첫째 때부터 안 그랬더니 가끔 유난히 가방이 무거운 날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도 우리 아이들은 다 하나같이 괜찮다고들 했다. 아이들은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본인 가방을 챙겼기에 그게 당연한 걸로 알고 살았다. 

 

작년은 코로나로 학교 수업은 물론 학교 방과 후 수업이나 학원 수업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고 주로 집에서 생활을 하다가 최근 들어 다시 학교 및 기타 활동들이 시작되었다. 저녁 6시 전에는 아이들이 모두 귀가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짜다 보니 중간에 빈 틈이 없고 다닥다닥 스케줄이 붙어버린 날이 생겼다. 그리고 급기야 며칠 전, 이제 4학년인 셋째 아이의 스케줄이 학교, 수학 방과 후 수업, 인라인 스케이트 강습, 태권도, 수영으로 정말 태릉선수촌 버금가는 죽음의 스케줄로 잡혀버렸다. 인라인 강습 마치고 바로 태권도에 가야 하는 아이를 위해 스케이트 가방을 받아주러 나갔는데 저 멀리서 자기 몸집보다 큰 가방을 메고 땀으로 홀딱 젖은 머리를 떨군 채 터벅터벅 걸어오는 아이가 보였다. 구름 낀 날씨 탓인가, 아이의 작은 체구와 좁은 어깨 탓인가…... 아이의 모습이 어찌나 짠하던지 나도 모르게 얼른 달려가 아이의 가방부터 받아주었다. 

 

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태권도장으로 보내고 아이 가방을 대신 메고 혼자 뒤돌아 오면서 '아 다들 이런 마음이었던 걸까? 사랑하는 여자 친구 가냘픈 손목에 그 작은 핸드백도 무거울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 금쪽같은 내 새끼 학교에, 학원에 여기저기 다니느라 고생인데 뭐 하나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었나…...'하고 난생처음 깨달았다. 그동안 우리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에 비교해 스케줄이 여유로운 편이었고 심하게 불평하는 편도 아니어서 가방 든 엄마의 마음을 미처 헤아릴 기회가 없었다. 나도 그렇게 내 가방의 무게를 짊어지고 버텼으니깐 다 그러려니 했다. 가방 든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싶다. 요즘 스케줄 최고조에 이르는 셋째는 기타도 배우고 싶다고 한다. 배우고 싶은 게 많은 그 마음을 또 저버리고 싶지 않은 부모인지라 기타 강습 스케줄을 어디에 껴 넣어야 하나 곰곰이 검토 중이다. 아! 결국 나도 이렇게 가방 든 엄마 생활이 드디어 시작되는 걸까? 

 

이건 여담이지만 연애할 때 가방이 좀 무거운 날도 남자 친구에게 가방을 맡기지 않고 열심히 들고 다녔더니 남편(구 남자 친구)은 지금도 내가 손에 주렁주렁 무겁게 뭔가를 들고 다녀도 빨리 캐치를 못 하는 편이다. '다른 건 눈치도 빠르면서 이런 건 참 눈치 더럽게 없네…...'내가 눈으로 욕하며 한숨을 두어 번 쉬면 그제야 손을 내민다. 가방 들어주는 마음이 애정과 비례한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가끔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또 어쩔 수 없네. 결국 가방 든 엄마처럼 가방 든 남자가 필요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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