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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04/12/21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로

떠내려가는 건 한 다발의 추억

그렇게 이제 뒤돌아 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가수 이상은이 스물세 살에 부른 노래 "언젠가는"의 가사이다. 학창 시절 나는 이 노래를 좋아해서 노래방에서 종종 열창하고는 했었는데 요즘 다시 들으면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그때 나는 분명 젊음을 노래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이 노래를 들으면 젊음을 추억하며 조금 쓸쓸해지는 기분이다.  

 

대학교 1학년 때인가 보다. 성당 청년회에서 라스베이거스로 1박 2일 여행을 가게 되었다. 차 몇 대에 삼삼오오 나눠 타고 신이 나서 출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후에 도착해서 이 호텔 저 호텔 한참을 걸어서 구경하다가 한밤중이 다 되어 예약된 호텔로 향했다. 밤새 꺼지지도 않는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불빛에서 꽤 떨어진 곳으로 호텔이라기보다는 모텔급의 명칭만 호텔이었다. 입구에 들어섰는데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고 용건이 있으면 벨을 누르라는 작은 사인이 붙어있었다. 벌써 20년도 지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벨을 누른 후 한참 만에 누군가 나왔고 한동안 대화가 오고 갔다. 나는 저만치 서있어서 대화 내용을 듣지 못했지만 뭐가 문제인지 호텔 예약을 담당했던 오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 것만큼은 정확히 기억한다.  

 

결국 우리는 그날 그 호텔뿐 아니라 어떤 호텔에서도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어쩌다가 그런 결론이 나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냥 그렇게 밤을 새우기로 했고 정말 한숨도 자지 않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정말 라스베이거스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호텔을 모두 두발로 걸어(내 기억에 나는 통굽구두를 신고 다녔음) 구경하면서도 힘든 줄도 몰랐다. 지금이라면 뜬눈으로 밖에서 밤을 새운다는 것 자체가 엄두도 안 날 것이고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하는 것이 걱정스럽고 불편할 텐데 스무 살이었던 나에게 그런 것은 걱정거리에 속하지도 않았다. "힘들지만 괜찮아"가 아니라 그런 것은 내게 힘든 일이 아니었다.  스무 살엔 그렇게 모든 것이 새롭고 설레었으니깐...... 

 

나는 MBTI 성격 검사 결과 대한민국 3%라는 ESFP, 혈액형은 O형으로 타고나길 사교적이고 적극적이며 활동적이지만 성격도 나이를 거스를 수는 없는지 요즘에는 무엇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너무 많은 것을 살피고 재야 한다. 한마디로 너무 걱정 근심이 많아져 버렸다. 신경 써야 할 것들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오만가지를 다 따지다 보면 결국 "포기"라는 출구를 찾고 만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고…... 끊임없이 안 되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기술만 늘어가고 있다. 젊은 날에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특전사 구호처럼 살았건만 언제부턴가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모드로 쉽게 생각을 접어버리는 나 자신이 안타깝다. 

 

그래, 가끔은 무모해도 용감했고 고생마저 즐거웠던 푸르게 젊은 날이 그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뭐래도 오늘 이 시간이 내게는 가장 젊은 날이다. 지금이 가장 젊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 것이다. 노래 가사처럼 "젊은 날에는 젊음을 몰랐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젊음이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지, 순수했던 사랑은 얼마나 고귀했는지 이제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인생의 타이밍은 참으로 신비로워서 우리는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이 모든 것들을 뒤늦게 알아버리지만 그래도 먼 훗날 언젠가는 오늘 이 순간마저도 그리워지지 않겠는가? 

 

보슬보슬 봄비가 내리고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오더니 황사와 미세먼지로 뿌옇던 하늘이 걷히고 하얀 뭉게구름이 동화책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젊은 날에는 미처 몰랐던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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