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살기
04/23/18  
농구 경기 도중 다리를 다쳤다.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매사를 천천히 하게 되었다. 걷는 것을 물론 눕고 일어나는 것, 심지어 식사도 천천히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불편하더니 곧 익숙해졌다. 일주일쯤 지나서 두 사람으로부터 산에 가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래 전부터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사람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어렵게 부탁한 사람들에게 다음에 가자고 하기도 힘들었다. 일요일 아침 6시에 만나기로 했다.
 
 
고민에 빠졌다. 어디가 좋을까? 지도를 펴 놓고 찾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으면 4시간, 빠르면 2시간 정도 소요되는 트레일을 골랐다. 물이 흐르고 산림이 울창하게 우거져 그늘 속을 걷는 코스로 LA에서 산에 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코스다. LA의 정릉 골짜기 같은 곳이다.
토요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동네 한 바퀴를 걸어 보았다. 그런대로 걸을 만 했다.
 
 
미국에서 하이킹을 전혀 해 본 적이 없다는 분과 예전에 고사리 따러 몇 번 산에 오른 적이 있다는 부부, 이렇게 세 사람을 만났다.
 
 
서둘러 간 탓에 7시 전에 도착했지만 주차장에는 차 댈 곳이 없었다. 세 사람을 주차장에 내려주고 한참 내려가 길가에 주차하고 걸어 올라와 산행을 시작했다. 쌍지팡이를 집고 걸었다. 정강이에 통증이 있었지만 걸을 만했다. 경사가 있거나 돌 때문에 울퉁불퉁한 길에서 통증이 심해졌다. 평소 하산 길에 느끼던 약한 통증이라 낯설지는 않았다. 즐기며 걸었다. 뒤에서 천천히 걷다보니 앞서가는 사람들이 가끔 기다려 주는 듯했다. 안내하러 온 산에서 배려를 받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즐기기로 했다. 천천히 걸으니 전에는 보지 못했던 풀이며 나무, 돌맹이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숲의 냄새는 더욱 짙었고 부드러운 바람과 햇볕이 몸속 가득히 스며들었다.
 
 
그리고 또 한 주일을 시작했다. 농구팀에서 함께 뛰는 분이 금요일 오전에 다 나았으면 코트로 돌아오라며 전화했다. 토요일에 가겠다고 했다.
 
 
잠깐 경기를 하고 끝난 후에 전화해 준 사람과 가볍게 아침식사를 할 생각으로 느지막이 갔다. 농구 코트에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살펴보니 달리기 대회 때문이었다. 온라인으로 참가 신청한 사람들이 참가 기념품과 번호표를 받고 있었다.‘5K Run and Walk/Wet & Wild 5K’라는 타이틀이 걸려 있었다. 지금 참가할 수 있냐고 물으니 45달러를 내라고 했다. 1458번 마지막 참가자라고 했다. 20분 후에 시작한다고 몸을 풀라고 했다. 다리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한 사람이 앞에 나와 몸풀기 댄스를 함께 하자고 했다. 출발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경쾌한 음악에 맞춰 가볍게 몸을 풀었다.‘과연 내가 뛸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마라톤을 11번이나 완주했으니 5K쯤이야 가볍게 뛸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렸다. 출발 선상에서 본인이 17분 이내로 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을 제일 먼저 출발시키고 이어서 20분대에 들어올 사람, 23분, 28분, 29분 이상, 걷거나 휠체어를 타고 걸을 사람들의 순서대로 출발시켰다. 23분대 대열에서 나갔다. 그러나 몇 발자국 뛰지 못하고 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단지에 통증이 있었다. 그냥 걸었다. 천천히. 평소에 자주 걷던 라미라다 공원인지라 익숙한 길이다. 잔디를 걷다가 포장길을 걷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수영장으로 들어가 신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 걸었다. 걸으며 참가자들과 대화를 해보니 라미라다 주민들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 하이랜드에서 온 사람도 있고 샌디에고에서 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수영장에서 나오니 바로 결승점이 보였다. 결승점에 도착하니 참가 메달을 목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먹거리들을 준비한 부스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글과 바나나, 오렌지를 각각 하나씩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좀 더 천천히 살아야겠다. 슬로 라이프(slow life), 안단테의 삶, 그 느림을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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