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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그 이상
04/19/21  

 

중2 때 담임 선생님은 메모광이었다. 본인 말로는 기억력이 매우 안 좋아 어쩔 수 없이 메모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항상 메모지 뭉치를 끈에 달아 목에 메고 다녔다. 그리고 뭐든지 닥치는 대로 적었다. 정말 이런 것도 적어? 이걸 왜? 싶은 것도 모조리 적었다. 그리고 걸핏하면 메모 속의 기록을 들춰보며 확인했다. 가끔 이성을 잃고 학생들을 때리긴 했지만 학생들에게 관심과 애착이 많고 열정이 넘치는 괴짜 선생님이었다. 덕분에 우리 반은 전교 꼴찌로 시작해 1학기 끝날 무렵에는 전교 1등 반이 되었고 환경 미화 1등, 구 합창 대회 1등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담임의 메모 습관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의 뭐든 기록하고 확인하는 철두철미함이 분명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나는 초등학교 내내 일기를 빠짐없이 쓰다가 중 2 때 부모를 떠나 미국으로 가게 되며 메모를 시작하였다. 사실상 기록 위주의 메모였는데 그때 엄마가 매일 엄마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한 말이 발단이 되었다. 매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 적는 게 중요하다 보니 지금 보면 주로 쓸데없는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누굴 만나고 헤어졌는지, 무슨 영화를 봤는지, 어떤 식당에서 무엇을 먹었는지, 누굴 만나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시시콜콜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수십 권이나 되는 그 기록들은 마치 내 인생의 일부와도 같아서 아직도 고이 모셔두고 있다. 비록 남편은 처치 곤란한 짐짝 취급하지만 축적된 기록과 메모들은 나의 자서전 그 자체이다. 

 

기록하는 습관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부터는 폰에 있는 캘린더 기능을 활용하게 되었다.  캘린더 앱을 열면 어릴 적만큼은 아니지만 꽤 다양한 것들이 입력되어 있다. 도넛 데이, 피자 데이, 맥주 데이, 형제 데이, 지인들의 생일은 물론, 지인의 배우자나 자녀의 생일, 지인들의 결혼기념일 그리고 고인의 기일 등등. 예전에 수첩을 사용하던 때에는 이 모든 걸 매년 옮겨 적어야 했지만 이제는 한번 입력하면 매년 반복도 가능하니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른다. 매일 아침 캘린더를 확인하면서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를 바치기도 하고 축하 문자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 걸 기억해? 어떻게 알았어?" 하면서 놀라고 고마워한다. 기억해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메모에는 힘이 있다. 지금보다 더 꼼꼼히 메모하던 시절에는 그 누구도 나의 기억력을 의심하지 못했다.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었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비결은 단 하나, 나의 메모하는 습관 때문이었다. 내가 방대한 기록과 자료들을 갖고 있었기에 오히려 궁금한 일이 생기면 나에게 물어왔다. 내 메모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때면 또 다른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더 열심히 메모하고 싶은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메모하는 습관 덕분에 어딜 가든 약속을 잘 지키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지키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는데 이것은 나의 중요한 능력이자 자산이다.

 

메모는 재료이다. 내가 글재주도 없으면서 꾸준히 쉬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다 메모 덕분이다. 나는 생각나는 이야깃거리들은 물론 마음에 드는 글귀나 책 제목들도 메모를 해두는 편이다. 아무리 멋지고 근사한 생각도 메모로 남겨두지 않으면 내 안에 온전히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비상한 기억력을 믿고 까불다가 정작 필요한 순간에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낭패를 본 일도 있었다. 하지만 메모를 해두면 그것이 장차 어떻게 사용될지 혹은 안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 마음만큼은 든든하다.  메모들이 모이고 모이면 풍부한 재료를 손에 쥔 요리사나 예술가처럼 마음이 뿌듯하다. 

 

메모는 어느덧 나의 생활이 되었다. 며칠 전은 캘린더에 기록된 "남편과의 첫 키스 20주년"이었다. 전날 밤 남편에게 넌지시 알렸더니 기억해주어 고맙다며 다음날 꽃을 보내줬다. 옆구리 찔러 받은 꽃이라도 예쁘니 좋았다. 역시 메모를 잘하면 떡 하나라도 더 생기는 법! 그동안 메모 덕분에 얻어먹은 셀 수 없이 많은 떡들을 생각하며 앞으로도 메모를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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