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1.5세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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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기다리며
04/26/21  

 

만 열 살 셋째와의 대화 중......

"엄마, 모든 건 다 끝이 있더라고."

"그래 많은 것들이 영원하지만은 않지. 끝이 있기도 하지.  그래도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

"그래도 죽으면 끝이잖아."

"아니야. 그래서 우리에겐 하늘나라가 있잖아. 죽어도 나중에 다 다시 만나."

"없을 수도 있잖아? 그냥 하느님이 우리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 수도 있잖아. 죽으면 슬프니깐…..." 

 

며칠 전 서울시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온라인 학생 정서 및 행동 특성 검사에서 최근 사고나 사건, 이별, 죽음 등으로 힘들어하고 있는지 묻는 질문이 있었고 셋째는 망설임 없이 "매우 그렇다"를 선택했다. 작년 여름 갑자기 하늘로 떠난 형을 떠올린 모양이다. 매일 웃는 얼굴로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 가고 친구와 노는 것을 좋아하고 주말 게임 시간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여느 초 4 남자아이와 다를 것이 없기에 괜찮구나 싶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 아이도 어쩌면 나처럼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불쑥불쑥 올라오는 그리움과 두려움을 꾹꾹 눌러 담으며 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래 아이들은 상상도 못 해봤을 죽음과 이별을 너무 이른 나이에 경험해버린 아이들…... 남은 아이들을 보며 느끼는 미안함과 애잔함은 내 몫이겠지. 

 

큰형을 하늘로 떠나보내고 남은 세 아이들의 인생은 뭐든지 큰형이 있었을 때와 없었을 때로 나뉜다.  본인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항상 형이 함께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지낸 크리스마스, 할로윈데이, 명절, 여행, 외식, 좋아하는 음식과 새로운 장난감 등등 모든 것을 함께 누리고 공유한 아이들이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그때 큰형도 같이 있었어", "아 거기 갔을 때는 큰형이 없었을 때지", "이거 오빠랑 처음 같이 먹었어", "오빠가 그때 이렇게 말했잖아"…...  큰아들이 떠난 지 9개월이 다 되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형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조금도 서슴지 않고 즐겁게 큰형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나에게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위안이 되어준다. 죽은 아들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배려해서 내 앞에서만은 쉬쉬하며 금기시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내가 아무렇지 않게 큰아이 이야기를 꺼내면 오히려 당황하며 얼른 화제를 돌려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가끔은 아픈 감정 없이 예전처럼 내 아들 이야기를 마음껏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식구들과 큰 아들의 추억을 나누다 보면 가끔은 겁이 난다. 지금이야 아이들에게 있어 큰형과 함께했던 날들이 더 많겠지만 세월이 흘러갈수록 자연스레 큰형이 함께하지 못한 날들이 더 많아질 테고 형의 자취는 줄어들고 기억은 희미해지고 형이 사라진 일상과 공간에 익숙해질 테니깐. 아직도 끼니때 숟가락 놓을 때마다 식탁에 앉아있을 것만 같은 아들이지만 언젠가는 숟가락 하나 비는 게 익숙해질 거라 생각하니 그것도 참 서글프다. 그게 너무 자연스럽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와 같은 당연한 순리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그냥 마음이 참 그렇다. 지금은 그저 아이들이 형과 함께했던 기분 좋은 기억 몇 개쯤은 가슴에 품고 살아가길 바라며 추억을 곱씹어 볼 뿐이다. 

 

아들이 떠나고 시간도, 세상도 그대로 멈춰버릴 것만 같았지만 정작 그 아무것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언제나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되어있고 놓치 못하는 것은 인간일 뿐, 자연과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이 척척 변화를 받아들이고 흐름을 따른다. 그렇게 어느새 2021년도 넉 달이나 지났다.  초콜릿 상자 속 열두 개 초콜릿 중 1/4을 꺼내 먹은 기분이다. 이번 초콜릿은 정말 무슨 맛인 줄도 모르고 먹어버린 기분. 하지만 그렇게 얼마 후면 한 상자를 다 비워내고는 "어? 내 초콜릿 다 어디 갔지?" 또 그러겠지. 그게 인생이고 사랑하는 내 아들, 한없이 보고 싶은 내 아들을 만나러 가는 여정일 테지. 아들 없이 맞이하는 첫 봄, 가만히 이 노래를 읊조려본다. 

아들을 기억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그대는 알고 있었죠 우리의 얘기가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다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었죠 우리의 얘기엔

세상 모든 일처럼 끝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걸 생각하지 못했죠

적어도 항상 되새기진 못했죠

우리가 마치 별들처럼 빛나던 날에

어떻게 그리 알았겠어요

잊지 말아 줘요 우리의 얘기를

나를 바라보던 그대 깊은 눈동자를

놓지 말아 줘요 찬란한 날들을

나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저 좀 멀어질 뿐이죠

 

​- 이적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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