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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와 신격호
04/23/18  
한동안 비어 있던 뒷집에 사람들이 이사 온 뒤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강아지가 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반복되는 소리를 귀담아 들어보니 사람의 소리였다. 고통을 참으며 지르는 신음소리 같았다. 소리를 문자로 그대로 옮기기는 쉽지 않지만 억지로 표현하자면“어이이이”“아이구구” “으이이이”등으로 들린다. 이글을 쓰는 지금도 소리는 그치지 않고 있다.
 
 
하루 종일 낮이고 밤이고 계속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듣고 있자니 짜증이 났다. 그 집을 찾아가 항의하려고도 했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가 내던 소리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처럼 하루 종일 내지는 않았지만 소변을 볼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며 아버지가 지르던 소리가 바로 저랬다. 아버지의 소리를 들으며 이웃들도 괴로웠을 거라 생각하니 견딜 만했다. 오히려 그 환자와 함께 사는 가족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고 만나면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야겠다.
 
 
20일,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했다.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어떤 모험이든 맞을 준비가 돼있다. 이제 모든 것이 신에게 달려있음을 느낀다.”카터는“수술로 간에 있던 흑색종을 모두 제거했으나 MRI 촬영으로 뇌에 4개의 새로운 흑색종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암이 다른 장기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뇌로 전이된 종양 치료를 위해 이날부터 방사선 치료와 함께 흑색종 치료약 키트루다 1회분을 투여 받았다고 공개했다. 분명히 그도 투병 중이다. 암치료를 받는 사람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지미 카터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차있었다. 그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 
 
 
카터는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비영리 기구인 카터재단을 설립하여 미국의 빈곤층 지원 활동, 사랑의 집짓기 운동, 국제 분쟁 중재 등의 활동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제 3세계의 선거 감시 활동을 했으며, 기니 벌레에 의한 드라쿤쿠르스 질병 방재를 위해서도 힘을 쏟고 있다.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는 없지만 퇴임 후에 세계평화와 인류건강에 기여한 그의 공로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카터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롯데그룹의 신격호 회장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신 회장도 목적과 방법은 다르지만 얼마 전에 기자회견을 했다. 두 사람은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곁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두 사람에게 내려진 그림자를 보면서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도 따져보았다. 그러다 보니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제한된 시간 속에서 옳은 선택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의 나, 미래의 나에게 어느 쪽이 옳은 선택인가를 신중하게 판단해서 선택을 하며 살다 보면 일등 인생은 아니더라도 인생을 즐겁게는 살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닥쳐왔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저항하거나 인정하거나 무시할 것이다. 어떤 반응을 하던 간에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이에 대해 예일대학의 케이건 교수는‘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므로 공포가 죽음에 대한 정당한 감정도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때문에“적절치 못한 감정으로 인생을 허비할 까닭이 없다.”면서“, 우리에게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기에 삶을 가능한 많은 것들로 채워 넣어서 최대한 많은 축복을 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즉 행복지수가 높은 삶을
위한 전략을 어떻게 짜야 하는지 설명한다. 죽음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삶’의 얘기를 하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죽음을 외면하려 한다. 아니 두려워한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죽음보다는 삶에 에너지를 쏟으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도, 우리 자신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어쩌면 죽음 있기에 삶이 더 가치를 발휘하는 지도 모른다.
 
 
카터 전 대통령과 신격호 회장의 인터뷰를 보면서 삶의 가치는 삶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채워지는‘내용물’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삶은‘그릇’이며 그 속에 채워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통합을 통해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고통을 참지 못해 비명을 지르는 이웃 남자의 삶이 무엇으로 채워졌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기자회견을 보면서 신 회장과 카터 전 대통령의 삶에 채워진 내용물은 가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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