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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
05/17/21  

이렇게 화창한 봄날, 방안에 홀로 앉아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을 줄은 몰랐다.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책 제목은 ‘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이다. ‘우리 사법의 우울한 풍경’이 부제로 달렸다. 저자는 판사 출신 변호사 정인진이다. 제목만 보고 그저 법관 생활하면서 느꼈던 ‘이상한 재판’, 상식과 윤리 도덕 너머의 법 집행에 있었던 문제들을 얘기하는 법관 시절의 반성문 정도의 책으로 가볍게 여기고 달려들었다가 내 어리석음을 깨닫고 적지 아니 당황했다. 몇 페이지 넘기지도 않았는데도 눈물이 흘렀다.

 

어업 금지 구역으로 넘어갔다가 발전소 해수 흡입구에 빨려 들어가 목숨을 잃은 해녀의 동료는 재판정에서 ‘우리는 죽기 위해 간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갔다’고 절규한다. 이 재판의 판사로서 겪은 정서적 충격을 '살라고 갔소'라는 장편의 시로 옮겨 놓았다. 이 시를 읽으며 눈물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또 재판정에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청년이 선서를 위해 손을 드는 순간 나타난 잘려나간 손가락, 어찌 눈물을 참을 수 있단 말인가. 변호사가 되어 첫 석방된 의뢰인, 짝퉁 명품을 팔던 청년 명상표 이야기에서는 그때의 그 법관이 꼭 읽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저자는 말한다. “나는 변호사가 되어서야 법이나 법원이란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법대(法臺)에 앉아서도 법의 한계를 알고 그 너머 세계가 있음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내려와보니 세상은 훨씬 깊고 넓었다.”

 

그럼에도 판사들도 법대 아래 서있는 사람들과 똑 같은 감정을 지닌 평범한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호소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면서 내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법관이라는 직업으로 법대 위에 서야 했던 이의 통렬한 자기반성을 넘어선 한 인간으로서의 외침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판사에게 필요한 것은 법령이 전부가 아니다. 판사는 바른 결론을 내기 위해 법정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여기서 상상력이란 법률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소설 쓰기가 아니라 인식의 지평을 여는 ‘공감능력’이다. 판사가 자리를 바꾸어 법대 아래에서 사건을 보는 것, 사건의 진실은 당사자가 가장 많이 알고 판사는 가장 적게 안다는 이치를 깨닫는 것,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마냥 살아 움직이는 현실을 판례에 끼워 맞춰 재단하지 않는 것. 가장 중요하게는 법대 아래의 사람들을 타자(他者)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남의 죄의 유무를 판결해야 하는 판사들이라면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 잡혀 판결해서는 안 된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상한 재판’을 멈추려면 법관의 사법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요즈음 유행하는 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선언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있다. 사법권은 국민이 필요에 의해 위임한 것일 뿐 판사 개인의 능력으로 얻은 훈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법정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판사라면 최후진술도 듣지 않고 판결 선고 기일을 지정하는 일도, 설명 없이 재판 기일을 계속 미루는 일도, 증인은 한 명만 신청할 수 있다거나 증인 신문 시간을 10분으로 제한하는 일도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저자 정인진은 역설한다. 그는 법관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눈물겨운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환치하고, 그러고 나서 비로소 어떤 행위를 평가하라고 주문한다.

 

이 책은 광범위한 영역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위안부 손해배상 판결, 성폭력, 낙태, 차별 금지법 등을 다루고, 이 시대 최대의 이슈,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권력집단의 자기 지키기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국민 대다수의 지지와 동의가 따라야 한다는 원론적인 결론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답이다. 일부 견해에 있어서는 나와 다소 다른 점도 없지 않지만 근본적인 정신과 그의 이론적 바탕에는 인본주의와 민주주의 정신이 깔려 있었다. 끝부분에 가서 그는 좋은 변호사 고르기, 변호사의 사용법 등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송사에 휘말릴 수 있는 시대다. 아무런 대책 없이 이리 저리 밀려가다가는 쪽박 찰 수도 있는 세상이다. 사전에 대비해서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은가?

 

법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아주 재미있게 이해하기 쉽게 잘 쓴 책이다. 한 분야에 전문직으로 일을 하다가 은퇴 후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 대개 빠지기 쉬운 회개나 반성만을 나열하지 않아 좋다. 잘난 척, 아는 척하지 않고 독자들을 가르치려 하는 책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읽어야 할 필독 도서로 적극 추천한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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