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정신 술자리
06/21/21  

나는 헤비 드링커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주종 크게 개의치 않고 술 한두 잔은 마시며 그 분위기를 즐기는 편이다. 비 오는 날 해물파전에 막걸리 이야기가 나오면 막걸리를 별로 안 좋아하면서도 크게 동요되고 아무리 배가 불러도 친구들과의 치맥(치킨 & 맥주)을 거부하는 법이 없는 편이랄까…... 그런데 며칠 전 오랜만에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 술이 등장했고 애석하게도 나는 단 한 모금도 마실 수가 없었다(전날 코로나 백신 접종을 했는데 3일간 금주해야 했고 백신 후유증이 무서워서 권고사항을 따를 수밖에 없었음).

 

시작은 좋았다.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봉사하는 셈 치자 싶어서 우리 집을 오픈하고 안주도 푸짐히 차렸으며 잔이 빌 때마다 열심히 술도 따랐다. 친구들도 처음 몇 번은 건배할 때마다 끼워주며 금주 중인 나를 안쓰러워하더니 언제부턴가 나는 안중에도 없이 술잔과 건배가 오가기 시작했다. 빈 맥주캔이 꽤 수북이 쌓여갈 때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나는 맨정신으로 도저히 그들의 텐션을 쫓아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조금 민감하고 위험한 화제에 들어서고 말았다. 다른 이야기들은 뭐 그런가 보다 싶었는데 가장 충격적인 것은 누군가 나를 오지랖이 심한 오지라퍼라고 칭하자 모두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오고 간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지만 이건 뭔가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아슬아슬했던 나만 안 취했던 술자리가 끝나고 다음날, 맨정신이었던 내 기억은 지나칠정도로 또렷했다. 특히 나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들은 그날 밤 세수하다가도 생각이 났고 자려고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날 판이라 그 다음 날 그 술자리에 함께 있던 한 친구에게 물었다. 

"내가 왜 오지라퍼야?"

"오지라퍼가 어때서? 사람들한테 관심 많고 잘 챙겨주는 거 그거 좋은 건데?"
"무슨 소리야? 오지라퍼는 아무한테나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이니 안 좋은 거지. 난 오지랖 떠는 사람이 제일 싫은데…..."

 

정말 그랬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불필요한 참견을 하는 것도 싫어하지만 안 친한 사람이 선 넘는 것도 매우 불편해하는 나였다. 그런데 나보고 오지라퍼라니! 한국에 온 이후 지난 3년간 그 누구보다 가깝고 친하게 지낸 친구들의 발언이었기에 그 충격이 더욱 컸다. 혹시라도 내가 오지라퍼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나 싶어서 사전까지 검색해봤지만 분명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억울함과 배신감에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남편은 나를 만난 이후 줄곧 술 없이 술자리를 지켜온 사람이다. 정말 술을 단 한 모금도 하지 않으며 술자리에서 콜라 마시며 술 마신 사람들을 상대해온 전설의 사나이! 지금이야 술 많이 마실 일이 별로 없지만 남편과 연애를 시작한 20대 때는 정말 줄기차게 술을 마셨었다. 술 때문에 그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에게 혼나기도 다반사, 그때 쓴 각서는 어디 갔지? 하지만 남편은 알코올에 힘을 빌려 취중진담 같은 걸 하는 것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남편을 보며 "그건 당신이 술을 안마시기 때문에 그런 거야"라고 치부해왔다. "술을 모르면 낭만도 모르지"하는 말도 안 되고 뜬금없는 논리까지 내세우며 술 못 마시는 남편을 타박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술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찐하게 술에 취한 사람들과 어울려보니 이거 꽤나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함께 취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술 취한 눈동자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고 동작이 커진 이들이 혹 술잔을 깨진 않을까 한밤중 큰 소리에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것은 아닌가 조마조마해서 온전히 즐길 수조차 없었다. 나도 이들과 함께 얼큰하게 취했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일들이다. 암튼 그날 맨정신으로 술자리에 앉아있으며 지난 20년간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면서 술자리는 물론 내 곁을 지켜준 남편이 그렇게 경이롭고 존경스러울 수 없었다. 술 없이 술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거의 보살의 마음과 다를 바 없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혈액형 O형(내 혈액형)의 성격은 단순하고 뒤끝이 없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별자리, 사주팔자, 관상, MBTI 다 뒤져봐라. 뒤끝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어떻게든 뒤끝은 있긴 마련, 술자리에서도 늘 말조심하고 특히 맨정신인 사람을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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