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홈으로 발행인 칼럼
제주 4.3 평화기념관
06/28/21  

중학교 동창생 석광훈 신부가 나의 제주도살이 14일째 되는 날 제주도에 왔다. 그의 일성은 4.3 평화공원 방문이었다. 우리는 4.3평화공원 내에 있는 기념관에 들려 4.3사태라는 참혹했던 역사의 시간을 목격했다. 기념관에는 4.3사태 당시의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등 관련 기록들이 풍부하게 전시돼 있어 비극적 역사 앞에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기념관을 둘러본 다음 위령탑으로 자리를 옮겨 향을 밝히고 참배했다.

그날 저녁 어디 다녀왔냐고 묻는 손자에게 4.3 평화공원에 다녀왔다고 하자 자기도 가고 싶다고 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아는가 물으니 학교에서 배웠다며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마침 다음날이 토요일이라 손자와 함께 4.3 평화공원을 다시 찾았다. 손자는 찬찬히 전시된 모형과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특히 손자는 영상물에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어느 영상물 앞에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눈도 돌리지 않고 화면만을 주시했다.

 

역사적으로 제주도는 외부 세력의 핍박과 홀대 속에서 자주와 자립을 키우며 제주만의 언어와 문화를 고수하며 살아왔다. 여러 사건들 중에서도 4.3사건은 끔찍한 역사적 오점으로 남을 만큼 제주도민들의 커다란 희생이 따랐던 사건이다.

 

제주 4·3사건은 남조선로동당(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제주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7년 3월 1일, 삼일절 제주도 대회 행사를 구경하던 군중들이 행사 종료 후 가두시위에 들어가자 이를 제재하던 경찰이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해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에 격앙된 민심은 가라앉을 줄 몰랐고 남로당은 이를 이용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4.3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에 경찰은 남로원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4·3사건은 발생 후 무려 7년 7개월이 지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비로소 막을 내렸다.

 

여러 정권에 의해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4.3사건은 1980년대 이후 각계각층의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이루어졌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 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2011년 1월 마무리한 결과, 14,032명의 희생자와 그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이후 4.3사건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탑을 세우고 4·3평화공원 등이 조성되었다.

 

사람들에게 4.3사건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나 세월호 사건보다 더 기억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4.3사건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벌어졌던 사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비극적 사건의 진실과 그 의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늦게 이루어졌고 홍보도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동안 역사에 관심이 있고 나름 역사의식을 갖고 살았다고 자부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기념관을 다녀오기 전까지 우리 민족 역사의 비극적 사건 가운데 하나인 4.3사건에 대해서 얼마나 피상적으로밖에 알고 있지 못했는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전시관 방문을 통해 알게 된 4.3사건의 진실은 사회 혼란을 틈타서 공산주의자들이 획책한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죄 없는 양민들을 괴롭히고 탄압하면서 살상으로 이어진 사건이다. 세심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조사하고 식별하여 처리했어야 하는데 귀찮고 식별하기 어려우니까 모두 공산당으로 몰아 처형한 것이다. 게다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남로당원 색출 작업은 더욱 기승을 부렸을 터이니 일반 국민들에게는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석광훈 신부와 나는 위령탑 앞에 놓인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다.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