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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보약인데
07/06/21  

잠이 보약이다. 정말 그렇다. 나를 잘 아는 오랜 친구가 언젠가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요즘에도 힘들면 자니? 너 무슨 힘든 일이 있으면 그냥 자버리곤 했었잖아."라고.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는 몸이 힘들 때뿐 아니라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도 잠을 청하는 편이다. 어릴 때는 부모님께 꾸지람을 들었을 때, 젊어서는 애인과 사랑싸움을 하고 난 후에 나는 자주 이불 속을 파고들곤 했다. 슬픔과 괴로움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출구로 잠을 선택했던 것 같다. 

 

게다가 실제로 이 방법은 꽤나 효능이 있는 편으로 단순히 자고 일어났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거나 하진 않았지만 대체로 자기 전보다 상황이 좋아져 있었다. 일절 입맛이 없었건만 갑자기 출출해지기도 하고 분명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는데 왜 그리 슬펐는지 기억이 희미해지기도 하고 그토록 화나고 원망스럽던 일들도 뭔가 그 열기가 한풀 식어 있었다. 그럼 또 주섬주섬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와 허기를 채우고 그렇게 그 순간을 버텨내고 회복하고를 반복했다. 그래서 나는 잠만 잘 자고 일어나도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잠"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다. 그리고 수면 부족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을 건강 보조식품이나 영양제, 헉 소리 나오게 비싼 고급 화장품들로 덮어보려고 한다. 나도 한창때는 잠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부지런한 것이라 생각했고 잠이 좀 부족해도 일상을 사는데 큰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평소보다 한두 시간만 덜 자도 다음날 피로감이 심하고 판단력도 떨어지고 신경도 날카롭고 예민해져 하루를 망쳐버리는 일도 생긴다. 이렇게 망치는 하루가 늘어나고 쌓이면 결국 건강한 일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인생마저 피폐해질 것이다. 

 

의사나 과학자들이 그럴듯한 근거들을 복잡하게 설명하며 잠이 보약이라고, 하루 7-8시간 정도 수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정작 현실은 잘 자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서는 자는 시간을 아껴 공부해야 한다고 주입시키고 일찍 취침하는 사람은 재미없는 사람, 야근이나 밤샘 업무 못하면 열정이 부족한 사람 취급해버리기 때문이다.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심히 자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인데 말이다. 잠이 부족해서 몽롱한 채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본인은 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산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차라리 잘 자고 잘 회복해서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제대로 집중하는 편이 무엇을 하든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잠을 청하곤 했던 나도 엄마가 된 이후로는 내 마음대로 원하는 만큼 자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엄마들이 출산을 하고 애엄마가 된 이후로 지금까지 잠 한번 제대로 자본 적이 없다고 토로한다. 수면 시간은 각기 다르겠지만 다들 항상 잠이 부족하고 수면의 질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 같다. 엄마의 잠 부족은 막달 임산부였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침대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은 막달 임산부가 되면 밤새 잦은 배뇨와 수시로 다리에 쥐가 나는 통에 숙면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애가 태어나고 나면 차라리 임산부였을 때가 좋은 시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 신생아들은 죄다 하나같이 밤낮이 바뀌어 버리는지 수시로 깨서 울어 젖히는 통에 몽유병 환자처럼 침대에서 일어났다 누웠다를 무한 반복한다. 그리고 산후 우울증은 호르몬 때문이 아니고 수면 부족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아무런 방해 없이 늦잠을 자고 싶은 소망이 있다. 물론 이제 더 이상 우리 집에는 자다 깨서 우는 아이도 없고 피곤하면 얼마든지 낮잠도 잘 수 있다. 주말에 미리 남편에게 말해두면 늦잠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 방해 없이”라는 대목에서 걸린다. 누가 침대에서 내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지 않더라도 항상 매 순간 누군가를 챙겨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은 나에게서 달콤한 잠을 빼앗아 버렸다. 누워있어도 쉬는 것이 아니오, 눈을 감고 있어도 깨어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정말 용하다는 보약 다 필요 없으니 마음 편히 꿀잠 한번 자고 싶다. 느지막이 눈을 떴을 때 밥 달라는 사람도 없고 쫓기는 일도 없는 그 평온함과 개운함을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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