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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좋은데 싫다
07/12/21  

최근 들어 아침마다 아이들을 향한 잔소리 톤이 한층 더 높아졌다. 그렇지. 여름이로구나! 아침부터 푹푹 찐다. 머리는 무조건 하나로 질끈 동여매고 최대한 시원하게 입어보지만 부엌에서 조금만 왔다 갔다 해도 금세 몸이 끈끈해진다. 아침부터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발이 바닥에 쩍쩍 붙는 게 습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전기세 걱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선풍기 틀어놓고 네스프레소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타서 혼자 천천히 여유롭게 아침을 맞이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보지만 현실은 아이들 등교 전 약 한 시간 반 동안 땀이 줄줄, 소리는 고래고래 지르며 아침을 보내고 있다. 불쾌지수 최고인 여름 날씨 탓인지, 인내와 덕이 부족한 내 성격 탓인지…... 아니다. 그냥 날씨 때문인 것으로 해두자.

 

그래도 나는 여름이 좋다. 태양의 계절, 휴가의 계절, 콩국수와 냉면의 계절, 빙수의 계절,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계절, 물놀이의 계절이라 그렇다. 좋은 것들이 너무 많은데 뭐니 뭐니 해도 수박의 계절, 여름을 알리는 신호탄은 수박이 아닐까 싶다. 요즘 수박은 굳이 통통통 두들겨 고심하며 고르지 않아도 아주 달고 맛있다. 미국에서 씨 없는 커다란 수박을 4.99불에 사 먹다가 한국에 오니 까만 씨가 가득한 수박도 2-3만 원씩 해서 수박은 별로 먹고 싶지가 않았다. 분명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개발했다고 배웠는데 왜 아직까지 한국에는 씨 있는 수박만 많고 씨 없는 수박은 훨씬 비싼 건지...... 한국 와서 한동안은 어쩌다가 누가 수박을 내놔도 씨를 빼먹기 귀찮아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이마저도 적응이 되었는지 씨 있는 수박도 군말 없이 잘 먹는 편이다.

 

수박 자르기는 언제나 남편 담당. 남편이 도마에 수박을 올리고 칼을 집어 들면 온 식구들이 눈을 빛내며 신이 나서 기다린다. 칼이 들어간다. 손목을 두어 번 움직여야만 수박이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빨간 속살을 드러내며 두 동강 난다. 남편이 한입에 먹기 좋게 깍둑 썰어 접시에 담아주면 포크로 찍어 입에 쏙~ 시원하고 달달한 수박즙이 입안 가득 메우면 '아 역시 여름에는 수박이구나!'하고 감탄하며 순식간에 접시를 비운다. 수박뿐 아니라 참외, 포도, 복숭아, 자두, 살구 등도 본연의 빛깔을 뽐내며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여름이다.

 

다양한 과일처럼 여름이 선물하는 다채로운 빛깔도 사랑한다. 시선을 사로잡는 쨍한 하늘, 강한 햇빛, 과하리만큼 진한 녹색, 비가 쏟아질 듯한 회색 하늘, 훨씬 화려하고 과감해진 사람들의 옷 색깔 등 여름은 그 어느 계절보다 컬러풀하다. 나뭇잎은 제대로 초록이 되고 숲은 더 짙어지고 깊어진다. 온 땅과 식물, 공기 중에는 물이 가득하다.  그 습기 덕분에 피부는 오래간만에 촉촉하고 윤기가 흐르는 듯하다.

 

그런데 또 나는 여름이 싫다. 현기증이 날 것만 같은 뙤약볕, 습식 사우나 속을 헤매는 듯한 축축함과 꿉꿉함, 비 온 후 진동하는 하수도 냄새, 덜 마른 빨래에서 풍기는 걸레 냄새, 상상을 초월하는 날파리떼, 각종 곤충과 모기, 무더위와 습함은 너무나 싫다. 특히 마스크가 일상이 된 요즘, 마스크를 쓰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콱콱 막히고 불쾌해서 외출이 즐겁지만은 않다. 어딜 가든 따라오는 날파리들은 또 어떤가…... 꼭 쓰레기 주위가 아니더라도 설마 했던 곳에서조차 기세 등등 날아오르는 놈들이 지긋지긋하다. 모기는 두말하면 잔소리. 모기 알레르기가 있는 우리 아이들 때문에 집안 곳곳에 모기 기피제를 설치하고 외출할 때도 꼭 기피제를 챙겨 갖고 다니지만 아무리 단속을 해도 모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와 함께 집으로 들어오니 여름내 모기 Free zone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최근에도 셋째는 모기 알레르기, 넷째는 풀독 알레르기로 피부과에서 스테로이드 성분의 약을 처방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여름이 좋을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여름에 내 생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나에게 1년 중 최애 달은 무조건 7월이었다. 6월 중순쯤 되면 7월 내 생일 파티에는 어떤 친구를 부를까, 선물로는 무엇을 받게 될까…...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밸런타인데이 등은 그런가 보다 하는 편이지만 생일만큼은 진심이었는지 여름 내내 나는 들뜨고 설레었다. 그리고 그 어릴 적 좋은 기억과 설렘이 영원히 나와 함께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올해는 날이 후덥지근해지기 시작할 때부터 여름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올해 처음으로 먹은 수박이 작년에 먹은 수박보다 맛있었지만 아이들 없이 자유부인으로 친구들과의 부산 여행도 잡혀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자꾸 가라앉았다. 너무 맛있어도, 너무 재미있어도 그러면 안된다고 자꾸 나를 잡아 끄는 무엇이 있는 것만 같다. 평생 해소될 리 없는 처연한 그리움, 사는데 가장 쓰잘머리 없다는 자기 연민 그런 것들이었을까……

 

하지만 여름이 싫다며 툴툴거려봤자 무엇하겠는가…... 어차피 올 여름이고 곧 떠날 여름이다. 좋든 싫든 자연이 내어주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감사할 뿐 거부는 어차피 내 몫이 아니다. 그래도 수박이 맛있어서 다행이고, 아침마다 소리 지를 자식들이 있어서, 함께 먹고 웃어줄 가족과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다. 이 여름도 그렇게 좋다 싫다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고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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