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경 소리
04/23/18  
창밖이 소란하다. 블라인드를 걷고 창밖을 내려다본다. 버스 정류소 벤치에 페즈(이슬람 모자)를 쓴 사람이 앉아 귀에다 무언가를 대고 다른 한 손으로는 책을 들여다보면서 입으로 소리를 내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녹음기를 귀에 대고 들으며, 경전을 보면서 크게 따라 읊고 있었다. 이어폰이 없는 모양이다. 녹음기에서 나는 소리도 꽤 큰데 그것을 귀에다 대고 들으며 또 입으로는 소리를 낸다.
 
 
그 사람에게는 천국으로 향하는 아름다운 소리일 텐데 다른 사람에게는 소음에 불과하다. 녹음기에서 나는 소리와 그가 내는 소리, 양쪽에서 나오는 소리가 세상의 평온함을 깨고 있다. 그는 2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 줄은 전혀 모르는 눈치다. 아니 설사 누가 곁에 있다 해도 상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의 삶도 저러하지 않은가. 언제나 자신의 소리만을 내려 한다. 다른 사람의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그의 처지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내 주장만 옳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자신의 것과 다르면 간섭하고, 자신의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비방도 서슴지 않는다. 과연 나의 방식이 아닌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일까.
 
 
한국의 교육부는 12일 중학교‘역사’와 고등학교‘한국사’교과서 발행체계를 국정으로 바꾸는 것을 뼈대로 하는‘중·고등학교 교과용도서 국·검·인정 구분(안)’을 행정 예고했다. 이를 두고 입장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 높이기에 여념이 없다.
 
 
필자는 고등학교 교사로 17년간 근무했기 때문에 국정교과서제로의 전환’에 관심이 높다. 더구나 교단에 첫 발을 디디며 국사를 가르쳤던 경험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국사’는 중고등학교 때 배운 것이 전부이고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한 학기 수강한 것이 전부인 상태에서 국사를 가르치라니 황당하기도 했다. 밤을 새워 교과서와 참고서를 공부하고 문제집의 문제들을 모두 다 풀어보니 대충 감이 잡혔다. 그러나 국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자세가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어째든 고조선에서 고려 말, 조선 건국 초기를 가르칠 때쯤 제 과목을 찾아 국민윤리 교사가 되었다. 그때 필자가 가르치는 방식은 무조건 암기였다. 학생들로 하여금 교과서 전체를 통째로 외우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다. 큰소리로 경을 외고 있는 저 사람도 나 같은 스승을 두었는지 모르겠다.
 
 
국정교과서제를 전면적으로 채택한 나라는 북한, 방글라데시와 종교적 특수성이 강한 몇몇 이슬람 국가에 불과하다. OECD 34개국 중 터키와 아이슬란드는 국정 교과서와 민간 검정 교과서를 같이 쓰고 있으며, 순수하게 국정만 쓰는 곳은 그리스 하나뿐이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워 민간에서 교과서를 편찬할 인프라가 구축돼 있지 않거나, 내전중인 나라, 일부 독재국가에서 국정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는 이념적으로 좌편향 돼 있어 학생들에게 정체성 혼란을 야기하게 하며 사회 갈등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하는 사람들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친일·독재 미화를 위한 것이며, 국민 통제를 위한 시도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정교과서든지 검인정교과서든지 중요한 것은 바른 역사를 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입장만이 옳다는 경직된 사고를 버려야 한다. 경직된 생각에 잡혀있는 사람들에게는 겸손이 없다. 그리고 겸손이 없는 사람들로부터는 양보를 기대할 수 없다.
 
 
바른 역사를 담기 위한 노력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무조건적인 찬성이나 반대는 자칫 잘못된 역사 기술로 이어져 후손들에게 그릇된 역사를 가르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용도서 국·검·인정 구분(안)’은 20일 간의 행정예고를 거쳐 다음달 2일 확정·고시된다. 이제라도 보다 유연한 자세로 내 목소리만 내기보다는 나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모색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느새 창밖이 조용해졌다. 버스가 왔다간 모양이다. 그는 가버렸지만 그의 독경 소리는 아직도 버스정류소 벤치 위에 맴돌고 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