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꽃 이야기
08/23/21  

 

한국 출장에서 돌아오니 타운뉴스 화단 한쪽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던 유채꽃은 다 지고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다행히 직장 동료 한 분이 씨앗을 받아 두었다며 건네주었다.

 

지난봄에 예쁜 꽃을 뽐내던 유채는 씨앗만 남겨 놓고 떠났다. 우리네 인간이 나이 들면 늙고 병들어 앓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처럼, 꽃을 피우며 자신의 생명력을 자랑하던 식물이 서서히 시들다 사라지는 것도 자명한 자연의 섭리이다. 그런데도 유난히 가슴이 시린 이유는 비닐봉지에 담긴 작은 씨앗들이 고국에 머물면서 만났던 친구들의 모습과 교차되면서 만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번 한국 방문 기간 중에 만난 중·고등학교 동창생 20여 명 중 다섯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직업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다섯 명 중 두 명은 자기 사업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셋은 부인이나 친척이 하는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또 대학 동창생 11명 중 일하고 있는 친구는 네 명에 불과했다. 세 명은 자영업자였고, 한 명은 보험설계사로 일하고 있었다. 은퇴한 친구들 중 서너 사람은 사회단체에서 재능 기부 등으로 소일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거의 농부가 되어 농사일에 푹 빠져 있었다. 그들이 직업을 가졌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농작물들이 판매되지 않고 그저 이웃이나 친지들과 나눠 먹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구들 대부분은 손자, 손녀를 돌보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고, 연륜이 묻어나는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패기와 씩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걸음걸이와 음성도 느리고 기운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대부분 약을 챙겨 먹기 위해 물을 따르고 있었다. 소년으로, 청년으로 만났던 사람들이 반백 년이 지나 만나니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정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득 붓다가 되기 전 싯다르타 왕자의 일화가 떠오른다. 궁전을 나와 마차를 타고 산책하던 싯다르타가 병들고 이가 다 빠지고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주름투성이 백발노인과 마주쳤다. 노인은 손을 내밀며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마부는 왕자에게 사람이 늙으면 저런 모습의 노인이 된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때 싯다르타는 깨달았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놀이며 즐거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

 

붓다는 한 노인의 모습을 통해 그 속에서 인간을 보았다. 싯다르타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피하려고 애를 쓴다. 그중에서도 늙음을 유난히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주름을 없애기 위해 약을 바르고 시술을 하고 이물질을 주입하기도 한다. 심한 경우는 살을 도려내기도 하고 뼈를 깎기도 한다. 이렇게 발버둥 쳐도 늙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다. 밖으로 보이는 신체의 일부분을 젊어 보이게 위장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육신의 노화를 어찌 할 수는 없다.

 

사회적으로도 노인 기피 현상은 심각하다. 노인 기피 현상은 고령사회의 큰 이슈 가운에 하나인 세대 간 갈등이란 말로 설명할 수도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 꼰대, 노인충, 노슬아치 등 노인을 지칭하는 비속어가 난무하는 것도 노인 기피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노인이 젊은이들과 똑같은 욕망, 감정 등을 표현하면 이해할 수가 없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은 노인의 사랑과 질투는 추하거나 우스꽝스럽고, 성 행위는 혐오스럽다고 생각한다. 또 노인에게 미덕의 본보기를 보여주기를, 무엇보다도 늘 평정심을 유지하기를 요구한다. 노인들에게 인간의 승화된 이미지, 경험이 풍부하고 참을성이 강한 존경할 만한 인간, 인간의 행·불행을 저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현자(賢者)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다. 노인들이 그런 이미지에서 조금이라도 다르게 행동하면, 손가락질하고 형편없는 인간 취급을 한다. 노망(老妄)들어 같은 소리를 되풀이 하거나 엉뚱한 생각을 하는 노인으로 전락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낙인찍기, 정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노인 혐오는 결국 '노인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노인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선진국들은 노인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각 개인들도 젊은 시절부터 노후의 삶에 대한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노인들의 행복한 삶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노인은 한 세대를 책임지고 살았고, 뒤따르는 세대에게 더 나은 현재를 물려주기 위해 젊음을 바쳤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인간다움’이란 존엄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존경을 받아야 한다. 인생의 마지막 20년 혹은 30년을 폐품 대접을 받으며 불행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인간이어야 한다.

 

11월이 되면 받아둔 유채 씨를 화단에 뿌릴 계획이다. 씨를 남기고 사라졌던 유채는 또 다시 노란 꽃을 활짝 피워 우리에게 새봄을 선사할 것이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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