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어 (엄마 파업)
08/30/21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다. 원래 주 3회 아침 일찍 러닝을 해왔는데 이번 주는 매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낚여서 아예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근데 얼어 죽을 일기예보는 맞는 꼴을 못 본다. 오전 6시에 비 올 확률 90%라고 했으면 비슷하게라도 와야지. 비 온다고 해놓고 비 안 오는 것은 둘째치고 실시간 기상정보에 비 안 온다고 해서 나갔더니 비가 주룩주룩 내린 적도 있어서 정말 할 말을 잃었다. 일기예보가 이렇게 막 완전히 다르면 대체 왜 일기예보를 보나? 그냥 내가 혼자 대충 하늘 올려다보면서 '어…... 오늘은 구름이 좀 어둡고 공기 중에 습기가 많으니 비 올 확률이 높겠군. 우산 챙기고 빨래 걷어야겠구나…...' 하는 거랑 뭐가 다른 거야? 

 

차라리 일기 예보에서 비 올 확률 90%라고 했어도 그때 뛰러 나갔어야만 했다. 안 가고 침대에 웅크리고 있으니 정말 만사가 귀찮다. 날이 흐려서 그런 건지 허리도 아픈 것 같고 며칠 전 운동을 무리했는지 근육통도 남아있고 기운이 쭉 빠진다.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그래, 이번 주 코로나 백신 2차 접종도 해야 하니 컨디션 조절 좀 하는 게 좋겠어. 오늘은 애들 밥만 챙겨주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아이들한테도 "오늘은 엄마 그냥 놔둬."라고 엄마 파업을 선언한 후 침대에 누웠다. 넷플릭스나 실컷 볼 심산으로. 요즘 "지정 생존자"를 보고 있는데 시리즈마다 정말 쉴 새 없는 테러에 음모와 배신으로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다. 

 

그런데 넷플릭스 앱을 아직 켜지도 못했는데 잠시 후 막내가 눈앞에 나타났다. 

"엄마, 나 코피 나."

코피를 닦아주고 휴지를 잘 말아 (애 넷 코를 틀어막아주다 보니 이런 기술만 발달함) 코에 사뿐히 안착시켜주고 10분 후 알아서 휴지를 빼라고 알려준 후 애를 내보냈다. 

 

넷플릭스 앱을 켜고 반가운 주인공 얼굴이 화면에 따악 들어왔는데 식탁에 앉아 원격 수업하던 셋째가 "엄마! 엄마!" 나를 부른다. 

"엄마, 와이파이가 안 되나 봐. 수업 중에 자꾸 튕겨져 나와." 

어휴…... 이 망할 놈의 코로나…... 대체 학교는 언제 갈 수 있는 건지…... 과연 이렇게도 학습 효과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원격 수업만 주구장창 해대는데 아주 답답하다 답답해. 온라인 수업이라며 EBS 방송으로 때우던 작년보다야 훨씬 나아졌지만 무슨 수업을 어떻게 하는지 9시에 시작해서 12시면 모든 수업이 다 끝나니 아무리 급식시간과 중간놀이 시간이 제외되었더라도 수업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나도 온라인 강의를 들어봐서 알지만 이거 정말 제대로 집중하기 너무 힘들다. 성인도 이러니 한시도 가만히 못 있는 초등학생들은 오죽하랴...... 

 

애 랩탑 좀 대충 들여다봐주고 (내가 본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냥 자꾸 말하니깐 시늉이라도 하는거지) 뒤돌아 오려는데 어디선가 쾌쾌한 냄새가 코로 흘러 들어온다. 아무래도 빨래통에 젖은 빨래가 있는지 쉰내가 나는 것 같다. 아…... 오늘은 빨래하기 싫은데…... 두 눈 질끈 감고 싶지만…... 쌓여있는 빨래는 모른 척해도 코로 흘러 들어오는 쉰내는 도저히 못 참겠다. 빨래를 세탁기에 쑤셔 넣고 나오는데 고양이 화장실 모래에 묘분이 들쑥날쑥 올라와있다. 아니 고양이들은 볼일 보고 모래로 잘 덮어놓는다고 그러지 않았어? 적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배설물을 덮는 것은 본능 같은 것이라고 했건만 우리 집 애들은 날이 갈수록 왜 이리 뒤처리를 허술하게 하는지…...  암튼 오늘 하루는 스킵하고 싶었던 고양이 화장실 청소였지만 결국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아…... 오늘 점심 애들 밥 뭐 주지? 쉽게 쉽게 가자. 햄버거든 피자든 간단하게 배달 음식 시켜서 먹이자. 그런데 갑자기 유통기한이 임박한 채 냉장고에 틀어박혀 있던 훈제 오리가 뇌리를 스친다. 그리고 하는 수 없이 쌀을 씻고 밥을 안친다. 그럼 또 애들 밥 먹이고 설거지하고 고양이 모래며 털이 휘날리니 베큠도 좀 돌리고 빨래 다 되면 빨래 개고 아이들 학원 라이드 해주고 돌아오면 또 저녁 먹여야 하네? 

 

이럴 줄 알았어. 정말 아무것도 안 하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네. 옛날에 엄마들이 "엄마는 뭐 집에서 노는 줄 아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면 그게 뭔 소리인가 그랬는데…... 그런 거다. 눕자마자 일어나야 하고 앉을 만하면 서야 하고 하루 종일 움직였지만 뭐했는지 아무 티도 안 나고 "엄마, 엄마" 하루에도 골백번 죄다 나만 찾지만 나는 정작 찾을 사람이 없는 엄마의 운명. 파업은 무슨…... 허구한 날 틀리는 일기예보처럼 오늘 나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모든 것들을 결국 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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