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안의 습격
09/07/21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에게도 찾아왔다. 바로 "노안".

올해 초부터인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볼 때 자꾸 무의식적으로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리는 나를 보고 일치감치 남편은 노안이 아니냐고 의심했지만 "그럴 리가!" 한사코 아니라고 우겼었다. 20대 때는 끼고 자도 멀쩡했던 콘텍트렌즈를 착용하면 눈이 쉽게 건조해졌고 한참 모니터 화면이나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침침하거나 피로하다고 느끼는 일이 잦았지만 크게 염려하지 않았었다. 비염 때문이거나 피곤함에서 오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노안은 흰머리나 주름처럼 눈에 확 드러나지 않는 노화 현상이라 긴가민가, 설마설마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꾸 가까이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안경을 벗게 되니 어쩔 수가 없었다. SNS에 올라오는 포스팅의 작은 글씨들을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나 거울 가까이로 얼굴을 맞대고 눈썹 정리를 하기 위해서는 안경을 벗는 편이 훨씬 잘 보였다. TV를 보려면 안경을 써야 하는데 휴대폰을 보려면 안경을 벗는 편이 더 선명하다 보니 쉴 새 없이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는 일도 있었다. 모야..... 돋보기는 할머니들이나 쓰는 거 아니었나......

 

평생 안경이란 걸 써본 일이 없는 엄마는 환갑이 넘어서도 돋보기 챙기는 걸 자주 깜빡깜빡하셨다. 그래서 가끔 갑자기 작성해야 할 서류가 있거나 할 때면 하나도 안 보인다며 불편을 호소하셨고 나는 "왜 항상 돋보기를 챙기지 않느냐"며 의미 없는 핀잔을 던지곤 했다. 나처럼 열두 살 때부터 안경을 썼다면 모를까 평생 본인의 시력으로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운전까지 하셨으니 갑자기 찾아온 노안이 더 당황스러우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흔을 넘기신 이후로는 늘 가방에 돋보기안경을 챙기시는 눈치다. 

 

몇 해 전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이 가까운 게 잘 안 보인다며 머지않아 돋보기가 필요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웃으며 하길래 영혼 없이 들으며 흘려 넘겼었다. 큰 의미 없는 푸념이나 그저 우스개 소리인 줄 알았는데 이제 내 차례인가? 그러고 보니 올해 들어 내 주위에 또래 친구들을 만나도 하나둘 비슷한 증상들을 토로하기 시작했었다. 어느 누구는 안경 맞출 때 다초점 렌즈인지 뭔지를 하겠다는 소리도 했었고 노안 수술에 관심을 보이는 친구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았을 때가 머릿속에 생생하니 바로 엊그제만 같은데…... 내가 노안이라니 갑자기 서글펐다가도 내 친구들이 함께 늙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픽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전에 어느 시상식에서 시상자를 발표하던 아름다운 여배우가 대본 카드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카드를 앞뒤로 움직이는 제스처를 보였던 것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한 것처럼 전성기 때의 미모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던 그녀는 모든 아줌마들의 선망의 대상 그 자체였는데 그녀도 노안은 피해 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눈만큼은 노화가 왔을 때 거의 무방비 상태로 무너지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노화를 방지하고 늦춰보려고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운동도 하고 피부 관리도 받고 보톡스, 필러, 성형 시술과 같은 의학 기술도 동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정말 요즘에는 나이보다 대여섯 살은 젊어 보이는 사람들을 흔히 만날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노안은 좋다는 영양제, 특수 렌즈와 수술 등으로도 아직까지 대중들에게 뚜렷한 효과를 입증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수많은 스타, 재벌들도 노안의 습격만큼은 피해 가기 어렵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안을 받아본다. 그래도 세상에 공평한 게 하나쯤은 있어서 다행이랄까......

 

그래, 노안이 나를 덮쳤다. 설마설마했는데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노안이 온 이상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40년 넘게 썼으니 신체의 다른 기관처럼 늙고 녹스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이 두 눈으로 참 많은 것을 보고, 읽고, 감상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혹사시키지 않고 쉬게 해 줄 거라 약속할 순 없지만 남은 일생도 잘 부탁한다고 속삭여본다. 그리고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내 두 눈에 담아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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