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기억
10/11/21  

한기를 느끼고 잠에서 깼다. 비가 한바탕 오고 나더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특히 밤 기온이 급격히 낮아졌다.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30도 가까이 나기도 한다.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는다. 옛 기록을 꺼내 본다. 몸도 기억을 하는가 보다. 15년 전 오늘(2006년 10월 8일) 눈발이 날리는 산골고니오 정상에 올랐었다. 정상에 오르는 여러 코스 가운데 거리는 짧지만 경사가 심한 코스로 알려진 비비안 크리크 트레일을 걸었다. 주차장에서 처음 만난 크리스라는 사람과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걸었다.

 

여간해서는 물이 흐르지 않는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 한 언제나 말라있는- Vivian Creek를 건너 Half Way Camp를 지나 High Creek Camp를 거쳐 나무들이 별로 없는 길을 제법 걷다가 산골고니오 정상에 도달했다. 해발 11,499피트로 캘리포니아에서 마운틴 위트니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미터로 환산하면 3,504.9미터이니까 2,750미터인 백두산보다 훨씬 높다. 오전 6시 30분 산행을 시작해서 오후 6시 10분 트레일 헤드로 복귀했다.

 

비비안 크리크 트레일은 왕복 17.2마일이다. 경사가 심한 오르막이 전체의 4/5를 차지하고 있어 오를 때 힘이 많이 든다. 하산할 때도 내리막이라고 좋아만 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사가 심해서 쉽게 내려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사가 심하다 보니 구불구불 산허리를 돌려 길을 내놨는데 그래도 만만치 않다. 기록에 의하면 새들에 도착해 정상으로 향하는 동안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해 곧 눈이 쌓였으며 손이 시려 장갑을 낀 것으로 나온다.

 

오후 1시 30분, 드디어 정상에 섰다. 아무리 오르막이 심하다 해도 예상 시간보다 제법 많이 지체됐다. 정상을 1.5마일 정도 남겨 놓고 많은 시간을 소비한 탓이다. 경사가 심한데다 고도까지 높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손과 뺨이 시렸다. 따뜻한 물이 먹고 싶은데 찬물뿐이었다. 크리스는 다른 날보다 바람이 심하지 않은 편이라고 했다.

 

정상에는 비상시에 대비해 박스가 놓여 있었다. 박스 속에는 캔 두개와 잡지책, 볼펜, 그리고 방명록이 들어 있었다. 캔은 누군가가 배고픈 이들을 위해 두고 간 듯싶었다. 우리는 준비해 온 점심을 먹었다. 크리스는 샌드위치와 작은 과일들(사과, 배, 자두 등) 나는 밥, 오이소박이, 김, 동그랑땡, 생선전, 배 세 조각, 약과. 소박이 냄새가 좋지 않을 듯싶어 크리스와 약간 떨어져 앉았다.

 

1시 50분 하산을 서둘렀다. 하산 길이 쉬울 거라고 예상한 내 생각은 빗나갔다. 정신없이 아무 생각 없이 서둘러 내려오다 보니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양쪽 엄지발가락의 발톱이 무지무지하게 아팠다. 그렇다고 속도를 줄일 수는 없었다.

 

통증까지도 즐기며 걸었다. 크리스가 2.5마일이 남았다면서 너 혼자라면 50분 안에 도착할 거니까 먼저 가라고 했다. 자기는 무릎이 아파 속도를 줄여야겠다고 했다. 아, 잘됐다. 나도 아프다. 함께 천천히 걷자. 주차장에 도착하니 6시 10분.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함께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이메일을 몇 번 주고받았고, 전화 통화를 한 번 한 것이 전부다.

 

주차장에서 운전하고 내려오는데 해가 지고 있었다. 아침에도 정면으로 해를 보고 갔는데 오는 길에도 정면에 있었다. 그 사이에 해가 서쪽으로 와 버렸던 것이다.

 

내가 산골고니오 정상에 오른 것은 기억하고 있지만 언제 올랐고, 몇 시간 소요되었는지, 누구랑 함께 올랐는지 등은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비교적 상세히 적혀 있었지만 미처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나는 그날 산행 후에 엄지발톱이 빠졌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그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날 내리막길에서 무리하게 빠른 속도로 내려오다가 발톱이 신발 앞부분에 자꾸 접촉하면서 생긴 부상으로 발톱이 빠졌었기에 잊을 수가 없다. 내 평생에 발톱이 딱 두 번 빠졌는데 한 번은 농구 경기 도중에 빠졌고, 다른 한 번이 바로 산골고니오 정상에서 내려오다 빠졌기 때문에 분명히 기억한다. 기록하지 않은 것은 기억해내지 않는 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도시에 비가 내리는 것으로 보아 산골고니오 정상에는 눈발이 날릴 것임에 틀림없다. 솜이불을 꺼내 덮고 다시 잠을 청한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