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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04/23/18  
LA에는 겨울이 없다고 흔히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LA에도 겨울이 분명히 있고 눈도 펑펑 내린다.
 
 
지난 일요일, 눈길을 걸었다. 트레일의 출발점인 주차장에 눈이 쌓여 꽁꽁 얼어 있었다.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손이 시려 재킷 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재킷에 달린 후드를 이미 쓰고 있는 모자 위로 덮어 써야 했다. 본래 가려던 길은 하천을 건너야 한다. 눈길을 걸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늘 다니던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걷고 싶었다. 눈이 덮인 하천을 따라 계곡 끝까지 오르고 싶었다. 이 길의 끝까지 가기로 했다.
 
 
1시간 가까이 걸었다. 어디선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귀 기울여 들어 보니 걸어 온 길 아래쪽에서 나는 소리다. 필시 트레일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따라 오는 것이리라. 잠시 기다리기로 한다.
 
 
청년 셋이 인사를 한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물었다. “당신들 비비안 크리크 트레일을 찾고 있지?“네.”“길을 잘못 들었다. 이 길은 트레일이 아니다.“계속 올라가면 트레일이 나올 것 같은데”“아니다.”다른 청년이 말했다.“우리는 당신을 따라 올라 왔는데”“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길은 트레일이 아니다.”“길이 아니라면서 당신은 어디를 가고 있는가?”“위쪽을 살펴보러 올라간다.”청년들은 실망한 눈치였다. 그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걷는다. 물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눈 위에 흙이 뿌옇게 덮여 있다. 주변의 눈 녹은 곳으로부터 흙먼지가 바람에 날려 온 탓이리라.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디디며 내려오고 있었다.
 
 
“어디서 오는가? 아침에 올라갔다 내려오는가? 아니면 비비안 크리크 트레일로 올랐다가 돌아 내려오는가?”빠른 속도로 물었다.“발자국 따라 계속 올라갔는데 폭포가 나오면서 길이 끊겼다. 길을 만들려고도 해봤는데 경사가 심해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내려오는 길이다.”
 
 
“당신은 비비안 크리크 트레일을 찾고 있지?”“네” “그렇다면 너무 많이 올라왔다. 40분가량 내려가면 이정표가 보일 거다. 그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밀 크리크를 건너가면 다시 이정표가 길을 안내해 줄 거다.” 청년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하며 멀어져갔다.
 
 
계속 오른다. 작은 폭포가 나타났다. 폭포 왼편에는 물이 튀면서 얼어붙어 있는 고드름이 한겨울임을 알려준다. 발자국을 찾는다. 비탈을 오르려고 시도했던 흔적이 도처에 있었지만 길은 거기서 끊겨 있었다. 길을 개척하기에는 경사가 너무 심하다. 그만 오르기로 한다. 준비해 온 빵을 하나 꺼내 먹는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하산을 시작한다.
 
 
내리막에 눈길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디딘다. 삼십 분쯤 내려왔다. 무릎도 아프고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집에서 편하게 쉬고 있지 왜 추운 날 눈밭을 헤매고 있는가.
그때 한 남자가 아이 둘과 올라오고 있었다. 맨몸에 나무 지팡이 하나씩을 들고 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찬바람에 양 볼이 빨개진 아이들이 환하게 웃는다.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이 길은 트레일이 아니다. 더 이상 올라가 봐도 길이 없다.”아이들의 아빠가 말했다.“그냥 눈길 따라 올라왔다. 조금 더 올라갔다 내려와도 괜찮은가?”어디 사는가 물으니 레드랜드에 산단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이곳은 동네 뒷산이다.
“마음껏 즐기시게나.”
 
 
하산 길에도 눈길은 계속 되고 매서운 추위는 쉬지 않고 지친 몸을 몰아 붙였다. 이 날씨에도 사람들은 산에 오른다. 눈 내린 길을 헤매기도 하고 트레일을 만들려 시도하다가 물러서기도 한다. 길 아닌 곳을 걷다가 되돌아오기도 한다. 눈 내린 산을 헤매는 것은 그대로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된다.
 
 
춥지도 않고 눈도 내리지 않는 LA에 산다고 실망할 필요 없다. 한국에서는 눈에 얽힌 추억이 많았는데 이곳은 삭막하다고 불평할 것도 없다. LA에서 한 시간만 나가면 눈 쌓인 산들이 즐비하다. 한겨울에 LA 한인 타운에서 10번을 타고 동쪽 방향으로 가다보면 5번을 만나기 전에 정면 왼편에 눈 쌓인 산들이 보인다. 새벽부터 일찍 움직이면 거뜬히 하루 동안 눈길을 즐길 수 있다. LA에 살면서 눈에 얽힌 새 추억을 만들 수 있다.
 
 
눈길도, 인생길도 즐기는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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