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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치기
04/23/18  

알란은 100세 생일날 양로원을 탈출한다. 하나에서 열까지 원장이 시키는 대로 틀에 맞춰 살기 싫었다. 죽을 날만 기다리며 양로원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온몸이 불편하지만 실컷 돌아다니고 싶었다. 버스터미널로 간다. 험상궂게 생긴 청년이 잠시 가방을 맡겼다. 마침 타려던 버스가 온다. 약간 망설이다가 알란은 청년의 가방을 들고 버스를 타버린다.

 

 

가방에는 돈다발이 가득 차 있었다. 이로 인해 갱단의 추적을 받는 신세가 된다. 도망자가 된 알란은 사기꾼, 수십 개의 학위를 받을 뻔한 사람, 코끼리를 키우는 아가씨 등 잡다한 무리를 만나 합류한다. 그리고 갱단을 쫒는 경찰까지 그들을 추적한다. 도피 과정에서 모험을 겪으며 알란은 세계사의 격변에 휘말리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장군의 목숨을 구했고, 미국 과학자들에게 핵폭탄 제조의 결정적 단서를 주었다. 위기에 빠진 마오쩌둥의 아내를 구했고, 스탈린에게 미움을 받아 노역을 살았다. 김일성을 만나고 어린 김정일도 만났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데뷔작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라는 소설의 내용이다. 이 소설은 2009년 출간된 이래 41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프랑스 120만 부, 영국 120만 부, 독일 4백만 부 등 전 세계에서 8백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2013년, 영화로 제작되어 스웨덴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으며, 판권은 전 세계 45개국에 팔렸다.

 

 

허무맹랑하며 기발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폭소를 자아내게 하며 우리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 들인다. 알란의 철학은 간단하다. 푸짐한 음식과 술만 있으면 세상에 바랄 게 없다. 그는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가장 싫어한다. 양 대 이데올로기에 의해 움직이던 시대를 살아가면서 알란은 정치적 견해를 갖지 않았다. 그때그때 마음이 끌리는 대로 행동한다.

 

 

지난주에 한국에서 스카우트 활동을 함께 하던 사람들을 만났다. 10여 년 전까지는 십여 명이 모였는데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타주로 이주하기도 해서 올해는 6명이 모였다. 그 중 네 사람이 80대 신사이다.

 

 

서로 건강해 보인다며 덕담을 나누면서도 세월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부인의 안부를 물으니 타계했다고 한다. 모인 여섯 사람 중 세 사람이 부인을 먼저 보내고 혼자 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혼자 사는 법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홀로된 지 7년차인 분이 식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침은 빵이나 고구마 우유 등으로 간단히 먹고 점심은 주로 매식을 하고 이때 남은 음식을 싸 갖고 와서 저녁에 먹는다고 했다. 다른 한 분은 수제비도 만들고 콩나물국도 끓여 먹는다면서 요리하는 즐거움에 대해 말했다.

 

 

한 동안 이어지던‘홀로 사는 법’토의는 건강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약 안 먹는 사람이 없었다. 고혈압, 당뇨, 전립선염 등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지내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로 옮겨졌다. 남이섬 야영대회, 덕유산 야영대회, 경주 야영대회에 이어 고성 잼버리까지, 그 밖의 각종 행사들, 보이스카우트 훈련소, 당시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의 근황, 이야기는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좀 전에 기운 없이 혼자 사는 법을 얘기하면서 넋두리하던 그 사람들이 아니었다. 손동작이 커지고 눈빛이 빛나고 음성이 커져 있었다.

 

 

모인 분들이 100세 노인은 아니지만 모두 창문 넘어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가끔 과거에 함께 했던 사람들과 만나 그 시절을 얘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과거의 사람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도 좋다. 나이 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젊을수록 창문을 넘어 도망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인생은 우리를 뜻하지 않은 곳으로 이끌 수도 있으니까.

 

 

2015년이 저물고 있다. 지나간 한 해를 되돌아본다. 지나치게 창문 안에 갇혀 살았던 한 해는 아니었을까. 내년에는 한 번 쯤 창문을 넘어 일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을 벌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면 되니까.
요나스 요나손은 책 속에서 알란을 통해 말한다. “너무 걱정하지마. 괜히 고민해봤자 도움이 안 돼.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거고, 세상은 살아가게 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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