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12/13/21  

새벽 3시, 셀폰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 서울에서 친구들이 모여 식사하다가 카카오톡을 했다. 친구들 한 사람 한 사람 바꿔가면서 얘기한다. 학교 다닐 때 자주 어울렸으나 졸업 후 처음 대화하는 친구와 먼 옛날 일부터 근황에 이르기까지 한참 얘기를 나눴다. 세상 참 좋아졌다. 오래 통화해도 받는 사람이나 건 사람이나 요금을 한푼도 내지 않는다. 무료다.

 

이렇게 통화하고 나면 다시 잠을 이루기 힘들다. 옛날 일과 사람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전화요금에 얽힌 20여 년 전 일이 떠올랐다.

 

당시 필자가 운영하던 회사는 미 전역에 전화 세일즈로 물건을 팔았다. 따라서 미국 내에서는 전화를 아무리 많이 걸더라도 추가요금이 부과되지 않는 장거리 플랜에 들어 있었다. 어느 날 전화요금이 평소보다 세 배 정도는 더 나왔다. 청구서 내역을 자세히 보니 국제 전화를 많이 사용한 것이었다. 사용자가 누군지 밝히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흔 가까이 되는 총각 직원이었다. 쌍까풀진 큰 눈을 갖고 있었고 머리는 늘 단정히 빚어 뒤로 넘기고 있었다.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거나 커다란 창고에 있으면 슬픈 생각이 들고 외롭다고 했다. 그래서 해외에 사는 친구들에게 전화했다면서 앞으로는 사용하지 않겠노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다음 달 청구서에도 국제전화 요금이 올라 있었다. 노총각은 또 고개를 푹 숙이고 우물거렸다. 혼자 있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전화를 걸게 된다며 미치겠다고 했다. 미국에 아는 사람이 없기에 닥치는 대로 한국으로, 유럽으로, 대만과 홍콩으로 전화를 걸어 그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매달린다면서 다음 달부터는 본인이 사용한 전화요금을 내겠다며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리 국제전화라 해도 직원에게 전화요금을 받는 것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 아예 국제전화를 사용할 수 없도록 조처했다.

 

회사에서 국제전화를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몹시 불안해했다. 안정이 안 되는 듯 보였다. 그런 증세가 한 동안 계속되다가 언젠가부터 본인 신상에 대해 털어 놓기 시작했다. 아이가 둘 있는 외국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날마다 만나고 있다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둘이 나눴던 대화를 전하기도 했고,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하면서 희망에 가득 찬 크고 맑은 눈을 반짝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낙심하고 실의에 잠겨 있는 그를 보았다. 여자가 만나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자는 자신과 같은 인종의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쫓아다니느라고 교통 위반 티켓을 하루에 세 차례나 받았다며 탄식하기도 했다. 밤늦게 귀가하는 여자를 보기 위해 기다리다가 깜박 차 안에서 잠들어 아침에 깨어난 적도 있고, 아파트 주차장에 있다가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았다는 등 불안정한 일상을 전해주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 사무실에 들어서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옷이 흠뻑 젖어 몸에 탁 달라붙어 피골이 상접한 체형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동안 감춰져 있던 그의 내면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머리와 얼굴이라도 닦으라며 수건을 던져 주었다.

 

젖은 얼굴을 닦으면서 ‘내가 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했다. 그 여자를 잊고 잘 살아보겠다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0 년 하고도 3~4년이 더 흘렀다. 이제는 세계 어느 곳에 살던 카카오톡에 가입 되어 있는 사람끼리 24시간 무료로 문자도 보내고 대화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렇게 확실하게 이어주는 수단이 생겨남에 따라 외로운 이민생활에 커다란 위로가 된다. 비행기 타는 순간, 그대로 단절되다시피 했던 옛날 이민생활과는 사뭇 다르다. 언제든지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실시간으로 문자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단절과 소외 없이 그대로 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카카오톡이나 화상 채팅 같은 교류 수단이 없던 그 시절, 삭막하고 외로운 이민생활을 어떻게 견디며 지내왔는지 모르겠다. 물건만 잔뜩 쌓인 휑한 창고에서 사람 목소리가 듣고 싶어 필사적으로 전화에 매달리던 그때 그 친구, 이제는 마음껏 즐기며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

 

깼다가 다시 잠들지 못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멀리 고국에서 들려주는 친구들 소식에 또 하루를 즐겁게 시작한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