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팥죽
12/19/21  

22일은 동지(冬至)다. 24절기 가운데 스물두 번째로 일 년 중 밤이 제일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하지로부터 차츰 길어지던 밤이 이날 극에 이른다.

 

‘동지 지나 열흘이면 노루 꼬리만큼 해가 길어진다.’, ‘동지 지나 열흘이면 소가 누울 자리만큼 해가 길어진다.’ 옛 어른들이 하던 말씀이다. 낮밤의 길이가 짧아지고 길어지는 이치에도 위대한 섭리가 담겨 있다. 밤이 길어지는 것은 그만큼 휴식을 취하라는 뜻이고, 낮이 길어지는 것은 노동시간을 늘리라는 것 아닌가.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농사 일로 하루를 보내던 농경사회에서 동지가 지나서부터는 해가 길어지는 시간만큼 더 열심히 일하자는 것이리라.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불 밝히고 일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 밤낮의 길이가 무슨 상관이냐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대자연의 변화에 적응하며 살던 조상의 지혜와 말씀은 후대에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 나눠 먹었다. 필자는 어려서 먹던 외할머니 팥죽의 맛을 아직도 기억한다. 하루 동안의 피로가 싹 가시는 그 은은한 단맛을 어찌 잊을까?

 

팥죽의 재료 중 붉은팥은 불을 의미하고 태양을 상징한다. 쌀은 곡식 중에 으뜸이며, 하늘의 모든 빛을 합한 흰색으로 하늘을 대표한다. 또 찹쌀로 둥글게 빚은 새알심은 수많은 행성, 혹성, 위성을 뜻한다. 팥죽 하나에서도 대자연의 섭리와 우주를 엮어 설명하는 조상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동짓날 팥죽을 쑤게 된 유래는 중국 육조시대의 연중행사와 풍속을 기록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서 찾을 수 있다. 진나라 공공(共工)의 개망나니 아들이 동짓날 죽어서 역신(疫神:전염병귀신)이 되어 전염병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그가 생전에 팥을 싫어했기 때문에 팥죽을 쑤어 곳곳에 뿌려 역신을 쫒았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팥죽에는 귀신을 쫒아내는 효험이 있다고 여기고 집안 곳곳에 뿌리기 시작했다.

 

신라시대부터 전해지는 팥죽의 유래도 있다. 젊은 농부가 살았다. 사람은 진실했으나 집안이 궁핍하였다. 어느 날 과객이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해 쉬어가게 했다. 그런데 그 과객은 해마다 같은 날 찾아와 자고 가면서 그해에 심을 농작물을 농부에게 알려주고 갔다. 과객이 시키는 대로 농사를 지은 농부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농부는 쇠약해져 갔다. 스님을 찾아가 의논하니 그 과객이 다시 찾아오면 무엇을 싫어하는지 물어보라 했다. 과객은 백마의 피를 싫어한다고 했다. 그래서 과객이 찾아올 때쯤 집 안팎으로 백마의 피를 뿌렸다. 그러자 과객은 찾아오지 않았고 농부도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해마다 백마의 피를 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어느 해부터 팥죽을 뿌리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민간신앙에서, 빨간색은 귀신들이 두려워하는 색깔이므로 붉은팥으로 끓인 팥죽에는 액운을 물리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팥죽을 먹기 전에 사당에 팥죽을 먼저 올리고, 부엌, 창고, 대문, 마당 등 집안 곳곳에 뿌렸다. 팥죽을 쑤어 먹는 풍습에는 잡귀가 가져오는 불운이나 전염병을 막기 위한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팥죽을 먹는 풍습에는 풍작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 농경사회에서 풍작은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팥죽은 한편으로 기근 음식이기도 했다. 우리의 밥상은 쌀밥을 주식으로 하여 여러 가지 반찬을 곁들이는 형태인데, 겨울에 쌀이 부족해지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 상황에서 팥죽은 최소한의 쌀로도 간단히 만들 수 있으면서, 필요한 영양분이 충분히 들어가 있는 훌륭한 음식이었다. 팥죽을 만드는 데에는 팥, 물, 약간의 쌀만 있으면 만들 수 있으며 그 외에 다른 어떤 재료나 반찬 등은 필요하지 않다.

 

중국 시인 ‘백거이’가 여행 중에 동짓날을 맞아 객사에서 읊었다는 시 한 수가 생각난다. ‘무릎 끌어안고 있으니 등불 앞에 그림자뿐, 고향집에선 깊은 밤 모여 앉아서 먼 길 떠난 이내몸을 얘기하고 있겠지’

 

집을 떠나 여행 중에 맞이한 동짓날에 식구들을 생각하면서 읊은 시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것은 고국을 떠나 사는 우리네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번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 먹으며 조상의 지혜가 담긴 풍습을 전하는 뜻 깊은 시간을 만들어야겠다. 지나치게 달지 않아 자꾸 손이 가던 외할머니 팥죽의 맛을 살려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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