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1.5세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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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지
12/26/21  

오랜만에 강남에 갈 일이 생겨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앱을 통해 확인하니 내가 타야 하는 342번 버스가 2분 후 그리고 7분 후에 도착 예정이다. 2분 후는 너무 촉박하다. 정류장까지 평소 걸어서 5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7분 후 도착하는 버스를 타기로 한다. 혹시 버스가 1-2분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 발걸음 속도를 조금 더 높여본다. 요즘 러닝과 등산으로 다져진 다리가 꽤 믿음직스럽게 움직여준다. 이런, 도착하고 보니 2분 후에 도착한다는 그 버스가 이제 막 정류장을 출발했다. '조금 더 빨리 뛰어왔으면 이 버스를 탔을 텐데…... 아니다. 너무 서두른 탓이다. 차라리 느긋하게 왔어도 되었을 것을…...' 하면서 버스 한 대를 먼저 떠나보냈다. 이렇게 요즘에는 버스나 지하철 도착 예정 시간을 실시간으로 검색해 예측할 수 있다. 정류장으로 향하며 미리 출발 시간을 정하고 걷기 속도를 조절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지 모른다. 내가 어릴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요즘 드라마 속에 남녀 주인공이 서로 연락이 안 되어 엇갈리는 장면이 나오면 뭔가 참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들지만 예전에는 실제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는 상대방이 집에 없으면 연락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집 앞에서 마냥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약속 장소를 착각해서 서로 엇갈리거나 하염없이 오래 기다려야 하는 일도 잦았다. 예를 들어 신촌인 줄 알고 나갔더니 신천이었다던가 강남역 5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한 명은 지하에서 기다리고 한 명은 출구 밖 지상에서 기다리는 등…... 외출하면 서로 연락이 안 되니 기다리고 엇갈리고 또 기다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었다. 

 

요즘에는 정말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루 종일 휴대폰을 손에 쥐고 쉴 새 없이 전화, 문자, 메신저, SNS 등 너무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다 보니 오히려 연락이 안 된다고 하면 의아하게 느껴진다. 소통 방법은 훨씬 다양하고 손쉬워졌지만 언제부턴가 전화 통화를 하는 일은 대폭 줄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내게 전화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최근 하루에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 나를 놀라게 한 사람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대선후보 허경영 사무실이었다. 가끔씩 남편이 퇴근길에 전화를 걸고 또 내가 운동 가느라 잠시 집을 비우면 우리집 셋째가 엄마 집에 언제 오냐고 전화하고 아, 가끔 전화하는 친구도 있다. 휴대폰에 벨이 울리고 친구의 이름이 뜨면 웬일인가 싶어서 받자마자 내가 "어, 왜? 무슨 일 있어?" 하고 친구는 "아니 뭐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전화하나? 그냥 해봤지." 하는데 괜히 멋쩍고 미안해진다. 

 

그러게…... 예전에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전화 통화를 참 많이 했었다. 한 사람과 몇 시간씩 통화해도 지칠 줄 몰랐고 그렇게 자주 오래 통화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너무 많아서 하루 종일 집전화기를 끼고 사는 통에 부모님께 여러 번 혼도 났고 전화기도 몇 번 압수되었고 전화요금, 전화카드로 꽤 많은 돈을 지출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전화하길 좋아하던 나인데 요즘은 전화가 걸려오면 깜짝깜짝 놀라니 참 별일이다. 

 

전화를 걸기 전에 문자로 "지금 뭐해? 통화 가능해?"라고 물어보는 것이 익숙해져서인가 이런 과정이 생략된 채 전화벨이 울리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특히 전혀 생각하지 못한 뜻밖에 인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아예 응답하지 않을 때도 있다. 무슨 일인지 예측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 후 문자로 "부재중 전화가 와있던데 무슨 일이신가요?"하고 묻고 대충 어떤 상황인지 파악한 후에 다시 연락을 하는 편이 훨씬 편하다. 나만 이런가 싶었는데 불필요한 대화나 만남 자체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전화로 하던 배달 주문도 앱을 통해서 하고 무인점포가 각광받고 온라인 쇼핑을 선호한다고 하니 이는 아마도 요즘 추세인 모양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불과 십여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많은 것들과 쉽고 편리하게 바로 연결되고 확인하고 예측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은 소소한 재미나 작은 서프라이즈들도 그만큼 줄어든 것 같아 아쉽다. 요즘에는 모든 급여가 은행으로 따박따박 입금되니 돈봉투 품에 안고 퇴근하는 기분을 알 턱이 없고 현금 얼마씩 따로 떼어내고 모으는 잔재미도 경험하기 힘들다. 아파트 공동 현관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거나 호출을 하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하니 친구 몰래 집 앞에 선물을 두고 가기도 어렵고 마음을 담아 손글씨로 꾹꾹 써 내려간 편지에 우표를 붙이고 빨간 우체통에 넣는 기분도 느껴볼 수 없다. 

 

나는 양쪽을 다 경험해본 세대로서 가끔은 과거의 낭만이 그립고 또 지금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미래가 궁금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점차 내 주위에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이 늘어날 테고 그럼 나도 나보다 어린 사람들 앞에서 "라떼는 말이지…... 그땐 그랬지…..." 하면서 옛날 고리짝 이야기를 펼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말에 이런 옛날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나이 들고 있는 게 맞긴 맞나 보다. 그나저나 그때 신촌까지 갔다가 신천으로 돌아왔던 그 친구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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