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
01/10/22  

여중 2학년 때 아주 특이한 담임을 만났었다. 이전 칼럼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던 메모하는 괴짜 선생님이다. 말도 못 하는 담임의 극성으로 시험 등수 전교 꼴찌반을 1등으로 끌어올린 것도 모자라 환경미화, 교내 합창대회 등 뭐든 우리 반이 전교 1등을 휩쓸었다. 합창대회는 교내뿐만 아니라 구 대회에서도 당당히 1등을 하면서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 반에는 전교 석차 1위 학생도 없었고 끼 많은 스타도 없었다. 우승 비결은 오직 하나, 엄청난 연습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다른 반 친구들은 모두 집에 가는데 우리는 아무도 집에 가지 못했다. 종례시간은 기본 한 시간이고 합창대회 때도 남들보다 몇 배 더 오래 남아 연습했다. 청소 당번도 대충이라고는 없었다. 청소 후 주번이 교무실로 내려가 선생님을 모시고 오면 담임은 커다란 안경을 올리며 매의 눈으로 샅샅이 검사를 했고 작은 꼬투리라도 잡히면 다시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담임과 얽힌 추억은 수많은 이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을 정도로 수두룩하지만 그 중에는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도 있었다. 

 

국어 담당이었던 담임은 꼴찌반을 1등으로 이끌기 위해서 수업 전후로 보충 수업도 강행했는데 그날도 아침 일찍부터 국어 보충 수업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수업 중 갑자기 담임이 호통을 치며 8번의 이름을 불렀다. 8번 친구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고 반 친구들도 모두 어리둥절해서 담임과 8번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봤다. 상황 파악을 해보니 8번이 다른 과목 숙제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당황하거나 부끄러우면 하얀 얼굴이 곧잘 빨개지곤 하는 8번은 평소에는 아주 얌전한 친구였다. 말썽을 피우는 친구도 아니니 담임이 일전에 전교 꼴찌에 학교 날라리였던 친구한테 했던 것처럼 고약하게 굴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담임은 8번을 교탁 앞으로 불러내고 갑자기 면장갑을 꼈다. 그리고는 겁에 질려 서있는 8번의 귀싸대기를 냅다 내려쳤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8번은 뒤로 나자빠졌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교실 안은 쥐 죽은 듯 숨소리조차 없이 고요했다.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한 것은 8번의 잘못이었지만 평소 행실이 바른 학생이었고 폭행 수준으로 체벌 받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담임은 8번에게 이를 악물라고 하고는 한두 대쯤 더 8번의 뺨을 후려갈겼다. 교실 안은 공포 그 자체였지만 누구도 입 뻥끗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8번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아마도 며칠 결석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학교에 소문이 돌았다. 8번의 어머니가 학교에 항의해서 담임이 징계를 받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담임이 학교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담임이 없으면 우리는 어떡해." 반 아이들이 웅성웅성거렸고 8번을 걱정하기보다는 담임을 걱정하는 여론이 거세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하굣길에 6번이었던 친구가 갑자기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8번에게 전화를 걸어 "너 때문에 담임이 학교에 오지 못하게 되면 다 네 책임이니 알아서 하라"고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이건 뭔가 잘못되었구나 싶었지만 그 친구를 말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옆에 서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마치 동조했던 것으로 기억되어 두고두고 마음이 불편하고 부끄러웠다. 

 

학교에서 어떻게 조처했는지 모르지만 담임은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 나왔고 나는 중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바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래서 담임이 그 이후에도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는지 8번은 어떻게 학교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살면서 몇 번이나 그때 그 끔찍했던 사건을 떠올렸고 그때 왜 우리들은 반 친구였던 8번의 편에 서지 않고 수업 시간에 딴짓 한 중2 여학생을 지나치게 체벌한 담임 편을 들었던 걸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 안에 절대 권력자였기 때문에? 능력 있는 지도자였기 때문에? 체벌할 때 눈이 돌아가는 것을 빼면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물론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시험을 못 보면 틀린 개수대로 손바닥을 맞았고 준비물을 안 가져오면 엎드려뻗쳐를 했고 교복 스커트 안에 속바지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허벅지를 맞아도 그런가 보다 하던 시절이었다. 여중이었지만 그 당시 우리 학교에서 체벌을 하지 않는 교사는 교장, 교감 그리고 양호 선생님 정도뿐이었다. 모든 교사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사랑의 매를 앞세워 체벌을 행했고 우리도 그들을 이해했다. 하지만 열네 살 소녀의 뺨을 가차 없이 내리치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내 머릿속에서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 너무 무력하게 8번을 지켜봐야 했던 나는 여전히 우물쭈물하는 일이 많다. 그때 담임을 저지하지는 못했더라도 8번의 어깨라도 잡아주었다면 어땠을까...... 지금도 끊임없이 만나는 8번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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