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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원희 박사를 추모하며
02/07/22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한 분이 지난 4일 유명을 달리했다. 1978년 7월에 대원고등학교의 설립자 교장과 교사로 만났다. 1993년 2월까지 14년 7개월(25살에 만나 40살까지)을 함께했다.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그 분과 나의 이야기는 사나흘 밤을 새우며 얘기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지막 만났던 2020년 6월 13일 이야기로 시작하겠다. 토요일이었다. 2주 후에 타운뉴스 새 사옥으로 이전하기 위해 주말임에도 회사에 나와 짐을 싸고 있을 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바로 그분이었다. "안 선생, 오랜만입니다." 한마디만 듣고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미국에 사는 딸네 가족과 식사 도중에 내가 생각나서 전화했다며 시간이 되면 얼굴이나 보자고 했다.

 

1993년 3월 미국으로 출발 하루 전날 그분 자택에 인사드리러 갔었다. 현금이 든 두툼한 봉투를 내밀면서 노자에 보태 쓰라 했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힘주어 얘기했다. 한국의 집을 팔지 말고 가라. 미국에 갔다가 일이 잘 안 풀려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면 당신과 함께 일하자. 나는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 그대로 하지 않겠다고. 절대로 함께 일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비장한 각오로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집을 팔았다. 돌아 올 곳이 없기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배수진이었다.

 

그해 내게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주었다. '안 선생! 大成하십시오.' 당신의 친필로 쓴 카드였다. 그리고1999년 11월 필자의 어머니 상중에 조문 오셨을 때 만났으니까 21년 만이지만 목소리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달려갔다. 함께 식사하면서 옛이야기를 나눴다. 식당을 나와 사진을 찍었다. 그날이 마지막이 될 줄 아무도 몰랐다. 건강한 모습이었는데 이렇게 황망히 가시다니.

 

그의 정신은 대원고등학교 건학이념 지자불혹(智者不惑), 인자불우(仁者不憂), 용자불구(勇者不瞿) 등에 잘 나타나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유혹에 빠지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처럼 지인용(知仁勇) 정신을 교육목표로 하였다. 1978년에 개교한 대원고등학교와 대원중학교(현재의 대원국제중학교), 대원여자고등학교, 대원외국어고등학교 출신의 인재들이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로 나아가 활동하고 있다.

 

내가 그분을 높이 사고 존경하는 것은 군자의 3덕을 교육목표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이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만사를 담당자가 책임감을 갖고 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고 맡겼다. 1984년, 당시 대부분의 학교들이 수학여행을 경주로 가던 때,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가겠다고 결재를 올렸다. 재단 이사장과 교장을 겸하고 있던 그분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좋은 시도라면서 잘 추진하라고만 했다. 결재를 받고 추진하던 중에 모 대학 학생들이 제주도로 졸업여행을 떠났다가 배가 침몰해서 조난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신문 기사를 보자마자 교장실로 뛰어가 제주도 수학여행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이때도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분은 ‘안 선생은 어떤 일에나 O 아니면 X 인데, △도 있다’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내게 충고했었다. 살다보니 그분의 말씀이 새삼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을 어느 한쪽으로 편협하게 살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으니 말이다.

 

1987년 1월 호주 세계 잼버리 한국대표단으로 그분과 함께 참가했었다. 잼버리를 마치고 오는 길에 기침을 심하게 했다. 그때 당신의 목이 긴 털스웨터를 건네주면서 입으라했고, 혹시 몰라 준비해온 감기약이라면서 특별히 조제해온 약을 건네주었다. 단 두 번의 복용으로 기침은 달아나버렸다.

 

특히 그분은 떠나는 사람들에게 잘했다. 학교 정책이나 방침에 거부하며 거칠게 대들던 사람도 이직을 하거나 전직을 할 때는 반드시 차나 식사를 하면서 따뜻하게 대접했다. 떠난 뒤에도 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비평하지 않았다. 그들과 만났고 소통을 계속했다.

 

내가 미국으로 이주하고 6년이 지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부고를 보내지 않았음에도 장례식장을 찾아 주었고, 아이들이 결혼할 때는 인편에 축의금을 보내주었다. 연(緣)을 소중히 여기는 분이었다.

 

지금도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분이라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 생각한다. 이제 이 세상 분이 아니지만 여전히 그분의 충고는 기억 속에 뚜렷하다. ‘이 세상에는 O와 X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 있다.’

 

대원학원 설립자 이원희 박사의 명복을 빈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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